[오형규 칼럼] "나라도 이런데 나라도 잘살자"

입력 2020-07-01 18:05   수정 2020-07-02 00:30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집단경험은 깊고 오래 간다. 혹독한 경제 위기, 전쟁, 재난, 전염병 등 모두가 함께 겪은 ‘정신적 외상’이 집단기억으로 각인돼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6·25전쟁과 산업화의 경험이 그랬다. 1980년대 민주화 집단경험은 지금도 훈장이지 않은가. 외환위기가 20년 넘게 집단 트라우마가 됐듯이, 코로나 사태도 최소한 한 세대 동안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집단경험에서 생겨나는 사회심리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는 게 세간의 건배사다. 지난해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 유행한 건배사가 ‘나라도 이런데 나라도 잘하자’였다. 올 들어 코로나 사태, 4·15 국회의원 총선거,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모두가 경험하면서 조금 바뀌었다고 한다. ‘나라도 이런데 나라도 잘살자.’

이대로 가면 베네수엘라 꼴 난다고 아무리 비판하고, 호소하고, 설득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좌절감의 발로인 것일까. 포퓰리즘, 재정파탄, 민주주의 위기 등을 우려하던 지식인들조차 이제는 제풀에 지쳐간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으로 꿈쩍 않는 정권에 질린 모양이다. 오히려 총선 민의를 내세워 하고 싶은 거 다 하려고 한다.

이럴 때는 오지랖 넓게 나라 걱정할 게 아니라 그저 정부에서 주는 돈 꼬박꼬박 받고, 정년까지 자리보전하고, 은퇴 후 복지 혜택 알뜰살뜰 챙기는 게 신상에 이로운 것인가. 나라 걱정하던 이들은 “나는 안 찍었으니 찍어준 너희들이 감내하라”고도 한다. 정치판만 보면 울화통 터져도 진중권의 화끈한 ‘모두까기’에 매일 ‘좋아요’를 누르는 걸로 대리만족한다.

애덤 스미스가 설파한 ‘사익 추구가 공익에 기여한다’는 명제가 250년간 경제 발전의 진리였던 게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지금은 거꾸로 ‘공익의 사익화’가 국민 스포츠가 돼 간다. 복지수당이든 기본소득이든 받고 싶지만 세금은 ‘부자가 내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실업급여 부부스와핑이란 것도 있다. 사업하는 친구끼리 부인을 상대 회사 직원으로 올려 월급을 챙기고, 나중에 해고한 뒤 실업급여를 받아 부부동반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죽었다 깨도 이런 상상을 못 할 텐데, 벌써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젊은 알바생이 노동위원회 제소를 들먹이며 해고해 달라고 업주를 협박하기도 한다.

모두들 ‘합리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나라는 점점 엉망이다. 어느덧 ‘하면 된다’는 한국인의 절대우위가 ‘주면 받겠다’는 실속주의로 변질돼 간다. 이런 ‘구성의 오류’를 극복하는 게 국가 리더십이고 정부 역할이어야 한다. 하지만 더는 감추기 힘든 정부의 총체적 정책 실패가 추락에 가속도를 붙여놨다. 공정과 정의를 내건 정부의 노동정책이 20대 청년을 울리고, “집값은 자신 있다”던 부동산정책은 30대 부부를 좌절시키고, 획일적 평준화 교육정책은 40대를 고민에 빠뜨린다. 끝 모를 경기 추락은 50대를 불안케 하고, 안보·외교 불안은 60대 이상을 잠 못 들게 한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된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스무 살 청년 입장에서 상상해 보라. 창창한 앞날은커녕 당장 일자리도 없고, 결혼·출산·내집 마련은 남의 일이고, 설령 취업해도 치솟는 세금과 사회보험료로 허리가 휘고, 50대가 되는 2050년대에는 국민연금 고갈까지 겪을 세대다. 향후 30~40년이 뻔한 그림이다. 초조해진 청년들이 주식이든, 비트코인이든 하루라도 빨리 돈 모아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란 얘기는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누군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지속적인 중산층 붕괴와 사다리 걷어차기로 계층 간 격차는 ‘넘사벽’이 됐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대통령 취임사의 무게는 새털보다 가벼워졌다. 개인이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한 번 맛본 재난지원금을 2차든, 3차든 마다하지 않는 게 합리적 선택이 된다. ‘나라도 이런데 나라도 잘살자’는 건배사 앞에, ‘미래세대에 죄짓는 것’이라고 아무리 외친들 소용없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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