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투기자본에 판 깔아줄 상법개정안

입력 2020-07-22 18:12   수정 2021-04-20 17:22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지난해 2월 현대자동차(4조5000억원)와 현대모비스(2조5000억원)에 7조원의 배당금을 요구했다. 현대차 전년 순이익의 3.5배, 모비스 영업이익의 1.2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엘리엇은 현대차와 모비스에 해외 경쟁사 임원을 감사·이사로 앉히라고 했다. 현대차 사외이사 후보(선임 시 감사위원 후보)로 로버트 랜달 매큐언 밸러드파워시스템 회장을 추천했다. 밸러드파워시스템은 수소연료전지 분야에서 현대차의 경쟁사다. 모비스 사외이사로는 로버트 앨런 크루즈 중국 카르마 오토모티브 최고기술책임자(CTO) 등을 제안했다.

대다수 주주들이 주주총회에서 현대차와 모비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엘리엇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현대차그룹은 막대한 자금 및 기술 유출 우려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약 1조1000억원을 들여 현대차 지분 3%(모비스 2.6%, 기아차 2.1%)를 확보한 엘리엇은 이미 2018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무산시킨 전력이 있다.

엘리엇은 2015년에도 삼성물산 지분 7.12%를 사들인 뒤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반대했으며 그 후유증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SK(소버린자산운용)와 KT&G(칼 아이칸)가 헤지펀드의 공세에 시달렸다.

‘엘리엇의 악몽’이 아직 생생한데, 정부가 투기자본에 판을 깔아줄 수 있는 내용의 상법개정안을 다시 밀어붙이면서 기업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상법개정안 주요 내용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강화 등이다.

다중대표소송제는 상장사 지분 0.01% 이상(비상장사는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그 회사의 자회사, 손자회사 임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업들이 사시사철 소송 리스크에 노출되고, 투기자본 등이 기업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적지 않다.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제도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이다. 투기자본이나 적대 세력이 이사회에 진입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총에서 이사를 뽑은 뒤 선임된 이사 중 감사위원을 선출한다. 감사위원을 뽑을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3%룰’을 적용한다. 개정안은 감사위원이 될 이사(1인 이상)를 처음부터 별도도 분리선출(3%룰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다.

감사위원은 감사와 이사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분리선출 제도를 통해 투기세력이나 헤지펀드가 1명이라도 감사위원을 배출하게 되면 이사회에서 사사건건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회사 기밀까지 빼갈 수 있다. 현행 상법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사외이사 3분의 2 이상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3인 이상)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고 있다.

기업들은 “기업 사냥꾼이 무리 지어 한 기업에 달려드는 ‘늑대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한다. 자회사 지분율이 높은 지주회사일수록 불리해진다는 점도 문제다. “정부 방침과 권유를 따라 지주사로 전환했더니 역차별을 받게 됐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순환출자 해소 등 지배구조 투명성을 높이라며 지주사 도입을 허용했다. 이어 집권한 노무현 정부도 기업들에 지주사 전환을 적극 권장했다.

보유지분에 따른 다수결로 경영진을 선출하는 원칙은 주식회사 체제의 근간이다. 4·15 총선에서 압승한 집권 여당은 다수결의 논리를 앞세워 18개 국회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친노동, 반(反)기업적 법안도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강행처리할 태세다. “거대여당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제1당의 의결권을 제한하자”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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