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담은 詩와 소설, 영상·음악·회화로 펼친다

입력 2020-07-26 16:54   수정 2020-07-27 10:13


“남포동 미도리마치에 내 친구들이 있다고 알려준 이는, 싱가포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사귄 여자애다. (중략) 미도리마치, 미도리, 미도리… 미도리는 초록이다. (중략) 초록은 슬픈데….”

소설가 김숨의 신작 단편 ‘초록은 슬프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도리마치(綠町)는 1916년 일제가 부산 서구 충무동에 만든 국내 최초의 공창(公娼)이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는 ‘그린 스트리트’로, 공창제 폐지 후 1948년부터는 완월동으로 불리다 1982년 충무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뒤에도 몇몇 친구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미도리마치에서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김숨을 비롯한 소설가 10명, 시인 1명의 이야기와 시가 미술과 음악 작품으로 펼쳐진다. 오는 9월 5일부터 11월 8일까지 열리는 ‘2020 부산비엔날레’에서다.

올해 부산비엔날레의 주제는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부산을 배경이나 소재로 한 소설과 시를 음악 및 미술작품으로 번역해 여러 층위의 예술을 부산에 입혀보려는 시도다. 전시감독을 맡은 야콥 파브리시우스(50·덴마크)는 “이번 전시를 인체에 비유하자면 문학은 뼈대, 시각예술은 장기와 뇌, 음악은 근육과 조직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직접 선정한 작가는 34개국 90명. 김숨 배수아 박솔뫼 김금희 김언수 편혜영 이상우 등 국내 소설가 7명과 김혜순 시인, 마크 본 슐레겔(미국), 아말리에 스미스(덴마크), 안드레스 솔라노(콜롬비아) 등 국내외 문인 11명이 부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새로 썼다. 이야기의 주제는 정치, 사회, 탐정, 스릴러, 공상과학, 역사가 가미된 픽션, 혁명, 젠더, 음식, 사랑 등 다양하다.

여기에 11명의 국내외 사운드 아티스트와 68명의 시각예술가가 문인과 팀을 꾸리듯 배치돼 주제에 걸맞은 작품을 선보인다.

‘초록은 슬프다’는 덴마크 펑크 록 밴드 ‘아이스 에이지’의 엘리아스 벤더 로넨펠트가 사운드 아트로 선보인다. 시각예술가로 참여한 화가 서용선(69)은 미국 뉴욕 지하철 파출소에서 행인들이 보는 가운데 수갑을 찬 채 서 있는 남자를 그린 2003년 작 ‘체포된 남자’를 출품했다. 그는 “평소 생각은 했지만 명료하지 않았던 소리와 색의 문제가 내 몸에 가깝게 다가왔다”며 “평범한 일상에 숨겨진 폭력을 건드리는 김숨의 방식이 나와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부산 출신 아내와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콜롬비아 소설가 안드레스 솔라노는 건축가가 식당에서 복국을 먹다가 독이 올라 사망한 사건을 사설탐정이 쫓는 내용을 썼다. 솔라노는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는 이중적 정체성을 소설에 풀어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대만 실험음악가 ‘무코! 무코!’가 음악으로 번역하고, 미디어아트 작가 김아영은 영상작품 ‘돌아와요 부산항에’, 일러스트레이터 람한은 신작 디지털 페인팅 ‘Case_01_01(toxin)’로 반응한다.

배수아의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는 말레이시아 미디어 아티스트 맨디 엘사예의 설치작품과 미디어 아티스트 강정석의 영상 작품 ‘어려운 문제’로 태어난다. 음악은 2010년부터 활동 중인 전자음악가 오대리가 맡았다. 김혜순의 시 5편에는 자연 요소와 인공재료를 혼합해 작업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비앙카 봉디가 ‘신성한 샘과 필수적 저수지’로 반응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을숙도생태공원에 있는 부산현대미술관 외에도 부산 원도심 일원의 다양한 장소와 영도에서 펼쳐진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영도대교, 조선소, 깡깡이마을, 봉래성당 등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최대한 아우르기 위해서다. 김언수의 ‘물개여관’에 대응하는 제이통과 진자의 음악, 미디어 아티스트 김희천과 존 래프맨(캐나다)의 영상작품은 영도 항구의 한 창고에서 만나게 된다.

파브리시우스 감독은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부산의 전시 장소들과 그 구역의 의미를 탐사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부산 곳곳에 남긴 흔적을 관객이 탐정처럼 찾아가는 재미를 느껴보라”고 당부했다. 원도심에서 부산이 겪은 세월을 통해 한국의 근대 역사를 탐방하고, 중앙동과 영도를 잇는 영도대교를 걸으며 과거에서 현재로 바뀌는 시차의 온도를 느껴보라는 얘기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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