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고무신 신화' 주역 대륙고무

입력 2020-07-30 18:23   수정 2020-07-31 00:15

‘순이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신만 신었다 벗었다 하였다. 신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스럽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옴큼 되었다가도 손을 놓으면 팔딱 제 모양대로 돌아지는 것이 퍽은 재미스럽다. (…) 하늘에 올라간 것만치나 기뻤다.’

정비석 단편소설 ‘성황당’(1937)의 한 구절이다. 그때만 해도 고무신은 귀했다. 고무신 한 켤레 값이 짚신 다섯 켤레와 맞먹었다.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너도나도 갖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신 제조회사는 1919년 8월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설립된 대륙고무였다. 이 회사는 1922년 첫 고무신 상표 ‘대장군’을 내놨다. 그해 9월 21일자 신문광고의 ‘대륙고무가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왕(순종)께서 이용하심에’라는 구절을 보면 순종에게 진상했던 모양이다.

고무신이 인기를 얻자 서울 중림동의 반도고무를 비롯해 중앙상공, 한성고무, 원산의 조선고무, 평양의 정창고무 등이 잇따라 생겼다. 1937년에는 전국 86개 회사에 종업원 8157명, 생산량이 연 3119만 켤레나 됐다.

광복 전 인기를 끈 상표는 서울고무의 ‘거북선’, 중앙상공의 ‘별표’, 천일고무의 ‘천(天)자표’였다. 광복 후 국제상사의 ‘왕자표’, 삼화고무의 ‘범표’, 동양고무의 ‘기차표’, 보생고무의 ‘타이어표’ 등이 잇달아 나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피란지 부산은 신발산업의 메카가 됐다.

고무신은 1962년 미국 수출을 시작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자’이기도 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고무신의 인기는 운동화로 이어졌다. 1974년 미국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계약을 위해 삼화고무를 직접 찾아올 만큼 각광을 받았다.

1990년대 OEM의 한계로 주춤했던 신발산업은 국산 브랜드 ‘프로스펙스’로 나이키와 맞짱을 뜬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의 ‘워킹화 시리즈’ 등으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이 업계의 금언처럼 ‘인류가 걸어다니는 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발산업이다.

내일(1일)은 101년 전 ‘고무신 신화’를 썼던 대륙고무의 창립일이다. 이제 남아 있는 고무신 공장은 몇 군데밖에 없다. 하지만 고무신에 얽힌 추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소풍 전날 이불 속에 품고 자고, 시냇물 속 피라미를 잡고, 다 닳은 고무신을 안고 엿장수에게 달려가던 어린 날의 풍경도 아스라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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