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광복절과 항복절

입력 2020-08-13 17:38   수정 2020-08-14 00:13

일본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이웃 나라 말의 숲’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젊은 시인 윤동주/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그대들에게는 광복절/우리에게는 항복절인/8월 15일이 오기 겨우 반년 전 일이라니/아직 교복 차림으로/순결을 동결시킬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시 속의 ‘항복절’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이른바 ‘패전일’과 ‘종전기념일’을 말한다. 군국주의 비판의 뜻이 담겨 있다. 이바라기는 윤동주를 좋아해 한글을 배우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수필도 썼다. 이 수필은 일본 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수많은 일본인이 한·일 간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항복 선언을 방송했던 NHK는 올해 패전 75주년을 맞아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기획물을 잇달아 내놨다. 요미우리신문 주필은 이 방송에서 “패전 이후 군국주의자의 책임을 엄격하게 묻지 않았기에 좋은 정치가 될 리 없었다”고 지적했다. 도쿄신문은 사설에서 “발을 밟은 사람은 밟힌 사람의 아픔을 모른다”며 “역사에 더 겸허해지라”고 촉구했다. 칼럼을 통해서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로 일본 기업만 타격을 입었다”며 정치권을 꼬집었다.

공교롭게도 어제 발표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2019년 주요상품·서비스점유율 조사’에서 한국은 스마트폰 등 7개 품목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반면 일본은 11개에서 7개로 줄었다. 정치·경제뿐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K팝 열풍’에 안방을 내준 이유를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의 반성과 성찰은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이기도 하다. 한국엔 ‘가깝고도 먼 나라’이지만 어떻든 일본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자, 5위 노벨상 수상 국가다. 기초과학과 정밀공학, 만화·캐릭터 등 문화상품 경쟁력까지 강하다.

‘책의 힘’과 ‘지식의 축적’에서도 앞서 있다. 공공도서관만 3300여 개로 한국(1096개)의 세 배다. 그래서인지 새의 눈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조감법(鳥瞰法)에 능하다. 광복 75주년이자 한·일 수교 55주년을 맞아 새삼 양국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라도 근거 없는 ‘정신승리’나 민족감정에 휩쓸리지는 않는지, 이를 자극하는 정치꾼들은 없는지, 눈앞의 티끌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건 아닌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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