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길 걸은 고려…방도는 없었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8-30 08:00  


고려는 1231년 원나라의 공격을 받은 후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문명이건 민족이건 붕괴를 시작한 집단은 혼란을 겪다 결국 ‘극복’ 아니면 ‘멸망’을 맞게 된다.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 전쟁 패배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다. 반면 내부에서 발생한 지배계급의 권력 교체나 쿠데타로 인한 붕괴는 백성의 실질적인 희생이 적다.
원나라 공격 후 150여년 간 붕괴된 고려
고려는 150여 년 간 서서히 붕괴했다. 그동안 원치 않은 국제전에 동원됐고, 부마국으로 독립성을 인정받았지만 영토 일부를 탈취당했다. 정동행성을 통해 정치를 간섭당하며 멸망의 길을 걸었다. 약 80년 동안 재위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의 충(‘忠’)은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몽골의 피가 섞였고, 원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공주와 결혼해 황제의 사위가 된 후 귀국해 왕이 되었다.

이들은 세계 제국인 원나라 궁전에서 국제정치를 학습하고, 우수한 문명을 체험했지만, 고려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현실을 몰라 정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원나라와 연결된 환관, 역관, 투항한 군인 등 친원파들과 공존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지어는 쿠빌라이칸의 사위인 충선왕을 티베트로 귀양 보냈을 정도의 권력을 가졌던 환관도 있었다.

원나라에 매년 150명의 처녀를 공녀로 바치면서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이 생길 정도였다. 이때 공녀로 끌려가 토구훈 테무르(혜종)의 비가 된 기황후의 일족도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이들은 건국 이래 존재한 문벌 귀족들, 무신정권의 잔재들, 고급 관료들과 합쳐 권문세족을 이뤄 정부의 요직들을 독점했다. 또 토지를 탈취하고, 겸병해 대농장을 만들어 고려 말기에는 '토지의 넓이는 주(州)와 군(郡)을 넘어다니고 큰 산과 강을 경계로 했다'(고려사 78권, 우왕 14년)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많은 농민은 노비로 전락했다. 국교였던 불교는 조계종을 대신에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질하고 타락했다. 불필요한 행사들, 사찰과 탑의 과도한 조성 등으로 국가의 재정이 낭비됐고, 대토지와 노비들을 소유한 대사찰들은 심지어는 고리대금업까지 벌였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고려 말기에는 외적의 위협과 빈번한 침공으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다.

왜구는 1223년부터 침략을 시작했다. 침략 횟수는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백여 회가 넘었다. 우왕 당시에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됐다.

14세기 중반에는 원나라에서 한족 농민들의 세상을 만들려는 붉은 두건을 쓴 홍건적들과 농민반란군이 등장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에 패배한 홍건적의 잔당들이 만주를 거쳐 고려를 침범해 1359년에는 서경(평양)을 공격했다. 1361년에는 개경(개성)까지 침공해 왕이 안동으로 피난 갈 정도였다. 당시 조운체제에 의존한 국가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은 농토를 잃었고 어업과 목축업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조세수탈까지 심각해지자 유랑까지 해야 하는 대재난을 겪었다. 그리고 최영, 이성계, 정지, 최무선 등의 신흥무장들이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신진사대부의 등장

붕괴와 달리 멸망의 조짐은 쉽게 감지할 수 없다. 항상 뒤늦게야 전 구성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극복하는 시도를 한다. 고려 말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실과 권문세족들, 자집단 중심의 새 질서를 구축하려는 개혁파, 희생을 담보하고 완전한 새 세상을 꿈꾸는 무력한 일부 백성들이 자기방식으로 움직였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려를 멸망시킨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들로서 향리 출신들이 많았다. 과거를 통해 다수가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던 학자적 관료들이었다. 특히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하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자 공민왕은 친명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관직에 등용시켰다. 실력과 자부심, 사명감을 가졌지만, 고위관직에서 소외됐고, 불공평한 토지소유로 인해 불만이 가득 찬 이들은 개혁의 이론적인 토대와 명분을 제공하고,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사상과 방략으로 성리학을 활용했다.
위화도 회군과 개혁의 시작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발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라는 사건이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가 안정되자 고려의 요동진출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로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에 요동 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했고, 이때 고구려의 수도권인 환인의 오녀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남은 북원의 세력들을 완전하게 토벌하자 명나라는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고, 고려에 1388년에 원나라에서 되찾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요구했다.

고려와 명나라의 위상을 결정짓는 사건을 놓고, 정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요동 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펴는 실권자인 최영의 주장대로 요동 정벌이 결정됐다. 이미 2차례의 요동작전을 펼쳤고, 당시의 불확실한 국제정세, 추후 명나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최영의 판단은 무모하지는 않았다.

반대파였던 이성계는 5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발해 음력 5월 7일에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물의 범람을 핑계로 14일 동안 도하를 미루다가 ‘4불가론’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첫째가 이후 조선의 정책과 사대부들의 인식에 굴레를 씌웠고, 바로 지금껏 우리 뇌리에 박힌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는 문구이다. 그는 회군한 지 11일 만에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고 쿠데타를 성공했다.

이성계는 특별한 기반이 없는 변방세력이었지만, 출중한 전투능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군벌로 중앙정계에 진입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공을 세웠다. 1361년 10만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한 당시 개경탈환 작전에 참여해 선발로 진입했고, 1364년 원나라가 파견한 군대와 전투해 승리를 거뒀다. 그뿐만 아니라 진포해전에서 대패하고 육지로 도망 온 왜구를 황산에서 대파했다. 이렇게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그는 최영 등을 죽인 후 삼군도총제사가 돼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했다. 이어 공양왕을 내세우면서 정권을 장악해갔다.

이성계의 이상과 개혁의지, 백성들에 대한 태도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정도전 등 젊은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이성계와 연합해 권문세족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관직과 특혜를 빼앗았고, 과전법을 만들어 대농장들을 몰수한 후 나눠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개혁의 방법, 미래 세계에 대한 전망과 헤게모니, 특히 새 나라의 건국 방식과 시기 등을 둘러싸고 정몽주 등 온건파와 정도전 등 급진파로 분열했다. 양측은 갈등을 계속하다가 결국 무력충돌까지 벌어졌다. 1392년 7월 16일 고려는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멸망했고, ‘조선’이라는 신흥국가가 탄생했다. 이른바 무혈로 성공한 역성혁명이었다.
혁명의 평가와 역사의 책임

역사 이래 혁명은 항상 있었다. 체제의 완전한 전복, 새로운 세계관과 권력층의 등장 등은 때때로 필수적인 일이다.

고려 멸망이 옳고 그른가의 평가는 최영의 ‘충(忠)’이나 정몽주·길재 등의 ‘의(義)’ 같은 명분과 도덕으로 잣대를 삼을 수는 없다. 개혁과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이익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이지, 자의성이 농후한 집단의 신념, 도덕으로 포장한 명분 등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후 조선이 취한 정책들의 오류와 유혈 권력투쟁 등의 양상을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개혁,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첫째는 붕괴를 일으키고 멸망을 재촉한 무능한 왕족과 부패한 기득권인 권문세족들이다. 둘째는 국가 이익에 충실한 최영 등과 정몽주 같은 도덕과 명분을 중요시한 온건 개혁파들이다. 셋째는 군사적 승자인 이성계와 성리학으로 신질서를 추진했던 정도전 등의 교조적인 신진 사대부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방관자로서 현실의 고통과 역사 속의 희생을 외면했던 고려의 백성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다. 궁금하다. 그들은 농민 반란으로 명나라가 세워진 것을 목도하고, 농민군인 홍건적의 힘과 피해를 체험했으면서도, 왜 자신들의 반란, 자신들의 혁명을 시도하지 못했을까?

역사는 말한다. 붕괴에서 멸망까지 걸리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류 문명은 탐욕과 패권국가의 욕망, 자연파괴와 감염병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균열이 생기고 있다. 한국 사회 또한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현상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극복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4가지 부류들은 아직도 눈치를 보는 중인 것 같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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