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인천·낙동강의 '망치와 모루' 작전[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09-14 09:58   수정 2020-09-14 10:11


대장간에서는 불에 달군 쇠를 두꺼운 쇠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망치(hammer)로 두드려서 연장을 만든다. 이때 받침대로 쓰는 쇳덩이를 ‘모루(anvil)’라고 부른다. 내리치는 망치의 힘만큼 떠받치는 모루의 힘이 강해야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를 활용한 군사 전법이 곧 ‘망치와 모루 전술’이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가 이 전법을 체계화한 뒤 획기적인 공격 전술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기병에게 망치(타격부대) 역할을 하게 하고, 이들의 공격을 돕기 위해 보병에게 모루(저지부대) 역할을 맡겼다.
알렉산더 대왕과 한니발 '압승 비결'
이 전술을 체계화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다. 그는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4만여 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10만 대군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승리했다. 100여 년 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도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이 전술로 로마군을 포위해 압승을 거뒀다.

현대에 들어서는 2차 세계대전 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이 이 전술로 승리했다. 다국적군은 해병대 병력으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 영토 안에 묶어둔 뒤, 20만 지상군을 투입해 이라크군 주력을 섬멸했다.
인천은 '망치', 낙동강 전선은 '모루'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에 적용됐다.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한반도 허리를 장악한 이 작전으로 전황을 일거에 뒤집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2차 대전 때의 경험을 살려 인천상륙이 전쟁의 판도를 가를 묘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모들과 미 국방부 수뇌부는 인천이 지리적으로 불리하다며 군산을 권했다. 상륙작전을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상륙에 반대했다. 반대할 이유는 많았다.

우선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에 밀물 때에만 상륙할 수 있다. 상륙선이 다음 밀물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므로 적이 반격하면 탈출하기 힘들다.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이 수백m 이상이어서 도보나 차량통행도 거의 불가능하다.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지원이나 보급을 받을 수 없다. 상륙지 주변의 방파제와 축대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이게 되면 아군의 피해가 크다.

좁은 해역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만조 때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가 좁아 상륙선박이나 지원포격 선박이 단일 통로에 밀집하면 적 해안포의 고정표적이 된다. 유속이 매우 빨라서 자칫하면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쉽다.

일부 참모들은 이런 점을 들어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안으로 전북 군산이나 경기 평택 포승 앞바다로 장소를 바꾸자는 의견이 많았다.
"적의 보급선을 완전히 끊어라"
그러나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보급품을 나르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가도는 모두 서울을 통과한다.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 서울까지 진격하면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전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이 잘리면 치명적이다. 한국 지형의 특성상 보급로가 끊기면 전차 등 중장비는 물론이고 사람만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므로 잘하면 북한군을 한꺼번에 몰아낼 수 있다.

맥아더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개시에 앞서 적을 교란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9월 5일부터 평양과 인천, 군산 등 서해안의 상륙 가능 지역에 폭격을 퍼부었다. 9월 12일에는 군산을 공격하고, 9월 14일과 15일에는 경북 영덕과 강원도 삼척 일대에 ‘장사상륙작전’ 등 교란작전을 병행하며 적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9월 13일부터는 인천의 관문인 월미도에 폭격을 시작했다.

이런 준비를 끝낸 1950년 9월 15일 새벽, 마침내 261척의 함정과 7만여 명의 병력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다. 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다. 월미도에는 이미 첩보부대가 잠입해 등대를 장악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 8대가 월미도 제방 위에 있던 인민군 장갑차를 격파한 다음 섬 전체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건너편 인천항 해안 포대에서 적이 응사하자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초토화시켰다.

작전 계획상 미 해병대의 월미도 해안 도착 예정 시간은 6시30분이었다. 미 해병대 1제대 선발대는 6시31분에 도착했다. 2분 뒤 주력부대가 도착했고, 곧 이어 다음 부대가 상륙했다. 10분 뒤에는 전차를 적재한 상륙함이 도착해 포격과 화염방사기를 퍼부으며 시가지 쪽으로 진격했다. 거의 완벽한 작전이었다.
서울 탈환,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인천 시내에 숨은 적을 소탕한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로 진격했다. 신촌과 연희동 일대의 마지막 저항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격한 것은 9월 26일 동틀 무렵이었다. 한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이었던 박정모(예비역 대령) 소위가 미군보다 먼저 입성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 장면을 박성환 종군기자가 촬영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은 차단됐고, 아군은 낙동강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혼비백산해 대백산맥을 타고 도주했다. 그 뒤를 쫓아 아군이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의 주요 시설을 북진했다. 무엇보다 수도 탈환은 우리 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북한군의 사기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세계 전사(戰史)는 인천상륙작전을 2차 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미드웨이 해전에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했다.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뚫고 성공한 ‘망치와 모루 전술’의 핵심 사례로 꼽았다.

이 전술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망치’의 활약만큼 ‘모루’가 튼튼하게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에 성공하더라도 저지부대인 모루가 무너지면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하기 쉬웠다. 다행히 낙동강 전선을 목숨 걸고 방어한 모루가 있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후속 전과가 가능했다. 내일은 인천상륙 70주년이다.
코로나 전쟁 '망치=방역' '모루=경제'
망치와 받침대가 모두 탄탄해야 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늘부터 2주간 2단계로 낮춰 시행된다. 아직은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고 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의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

국가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의 어려움이 계속되면 방역 시스템도 약해질 수 있다. 위기 상황일수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종합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감염병 위험을 줄이면서 국가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체질 개선에도 주력해야 한다. 방역이라는 ‘망치’와 경제라는 ‘모루’가 모두 탄탄해야 이 난국을 이겨낼 수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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