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법은 어디서 AS 받나요?

입력 2020-09-15 17:55   수정 2020-09-16 00:04

국회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시시각각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법안의 양이다. 20대 국회에서는 2만4141건의 법안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8799건이 반영됐다. 18대, 19대 국회에선 총 3만1735건이 발의돼 1만3607건이 처리됐다. 이 많은 법은 지금 어떤 형태로 우리 생활에 작동하고 있을까? 누가 모니터링은 하고 있는 걸까? 시행된 법들에 대한 사후서비스(AS)는 어디서 맡고 있을까?

20년간 산업 현장을 누비면서 법이 규범을 넘어 불합리한 족쇄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 현장에서는 법과 법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좋은 뜻으로 제정한 법이 세상의 변화 속도를 못 따라잡는 일도 있다. 법보다 강한 시행령이 산업계의 발목을 잡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한 예로 업계 숙원이던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행정안전부와 금융위원회가 데이터 결합 절차와 관련해 서로 다른 시행령을 마련하는 바람에 현장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사람들이 콘택트렌즈를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대면으로 구매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안경점과 안과, 약국에서만 콘택트렌즈를 판매할 수 있다. 심지어 국내 콘택트렌즈 제조사들도 늘어나는 소비자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해외 사이트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은 법 때문에 소비자와 제조사 모두 불편을 겪고 있고, 해외 기업만 살찌우는 상황인 셈이다. 신속한 법안 AS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공자가 산기슭을 지나던 중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세 개의 무덤 앞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에게 잃은 것이다. 공자가 호환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하자 여인은 “다른 곳은 가혹한 정치 때문에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여기가 낫다”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보아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

이제는 ‘가법맹어호(苛法猛於虎)’ 시대다. 법이 국민의 삶과 어긋나면 이보다 가혹한 것은 없다. 입법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입법 손절’이 대한민국에서 진행 중인 것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제품을 제조해도 체계적인 AS를 제공하지 못하는 회사는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법도 똑같다. 입법 이후의 상황을 꼼꼼하게 살피고 책임지는 ‘입법 AS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법안 취지대로 하위 법령이 제대로 짜였는지, 과도하지는 않은지, 국민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국회가 적극적으로 재확인하는 작업 말이다. 몇몇 주요 법안을 정해 시범적으로 규제 존속 기한을 두고 규제 입법 이력을 추적하는 방안도 좋겠다.

오늘도 수많은 법안을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 때로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도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 태산 같은 무거움과 호랑이 같은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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