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왕국(수도 한성시대)이던 백제는 고구려의 급습을 받아 수도는 물론 영토의 절반 이상을 빼앗기고 임금은 전사했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다. 부흥에 성공해 200년 가까이 국제적이고 강력한 나라를 이뤘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어떤 국가정책을 추진했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한 지혜와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해양활동과 해양력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다.
이어 등장한 동성왕은 위기를 수습하고 고구려의 군사적인 압박과 외교 방해를 이겨내기 위해 중국지역과 교류를 추진했다. 484년 양쯔강 이남의 남제에 사신선을 파견했지만 또다시 고구려 수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러나 곧 해양력을 강화해 양(梁)나라, 그 뒤를 이은 진(陳)나라와 외교, 무역, 문화교류 등을 활발히 하면서 강국으로 부상했다.
<주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진(晋)나라부터 송·제·양나라 때까지 양쯔강의 좌(左)에 있었다고 기록됐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그가 당나라 관리로서 작성한 공문서에 ‘고(구)려, 백제가 전성할 때는 강병이 100만 명이며, 남으로 오(吳)와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었다’고 쓴 글이 실려 있다.
이런 기록들은 백제(웅진시대)가 중국 해안지방에 상당 기간 진출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물론 중국의 남북 분단이라는 냉전 상황과 고구려의 영향력, 남조 계통의 사서에만 기록이 된 편향성 등을 고려하면 완전한 사실로 수용하는 데는 약간 무리가 있다. 앞으로 관련된 유적과 유물 등의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백제가 해양을 무대로 영향력을 끼쳤던 국가임은 분명하다.
백제와 왜국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가를 알려주는 유적이 있다.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면에서 고분이 발굴됐다. 양나라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에서는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새겨진 묘지석과 함께 금으로 제작한 관식을 비롯 금과 은으로 만든 각종 공예품 등 46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의 주인은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그는 규슈 북부 가카라시마(加唐島)에서 태어나 왜국에서 성장하다가 귀국해 25대 임금이 됐다. 그와 왕비의 시신을 모신 관은 일본에서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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