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기예·미감의 종합예술…"서예는 90%가 공부"

입력 2020-09-22 17:15   수정 2020-09-23 11:27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73)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혜화동 JCC아트센터. 4층 전시실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건 단행본 크기의 연습장 수십 권이다. 거기엔 각종 서체로 글씨를 연습한 흔적이 빼곡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붓글씨와 한문을 공부한 서예계의 거목이 지금도 서체를 연습한다니….

“저의 호가 ‘어찌 하(何)’에 ‘돌 석(石)’인데, 두 글자에서 무게감이 있는 건 ‘돌 석’이 아니고 ‘어찌 하’입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모든 것은 의문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그 의문이 없다면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전시장에서 만난 하석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하하옹치언(何何翁言)’.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

“예전에 ‘하하존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누가 무슨 쓴소리를 해도 하하 웃으니 사람들이 그를 ‘하하옹’ ‘하하존사’라고 불렀답니다. 나도 이제 누가 좀 고깝게 해도 하하, 웃어넘길 나이란 말이죠. 치언은 술 한잔하고 늘어놓는 횡설수설, 허튼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번 전시는 하하옹이 늘어놓는 횡설수설인 셈이죠.”

겸손한 설명과 달리 2~4층 전시장을 가득 채운 36점의 신작은 속이 꽉 차 있다. 광개토왕비체, 갑골문체, 금문체, 한간체, 중국 윈난성 소수민족인 나시(納西)가 지금도 사용하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 등 온갖 서체를 망라한 그의 작품은 글씨와 그림을 넘나든다. 하석이 손 가는 대로 쓴 ‘하하옹수수체(隨手體)’도 있다. 글자 속에 컬러를 넣는 동파문자체로 쓴 작품은 현대 추상화 같기도 하다.

글씨를 예(藝)의 경지로 끌어올린 건 서체의 조형미만이 아니다. 글에 담긴 메시지다. 그는 “서예에서 운필(붓의 놀림)은 10%뿐이고 공부가 90%”라고 강조한다. 다른 서예가들이 쓴 문구는 절대 따라 쓰지 않는 하석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을 섭렵해 자기만의 글귀와 문장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 은퇴 후 목표를 잃어버린 중장년, 국가 지도자 등 다양한 사람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았다.

‘舟車(주거)’는 배 주(舟)를 붉은색 갑골문으로, 수레 거(車)를 컬러풀한 동파문자로 쓴 작품. 배와 수레의 모양이 그대로 살아 있다. 여기에 중국 5대 10국 때의 재상 풍도(馮道)의 시 ‘우작(偶作)’을 적어 넣었다. 이곳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위험한 때 정신을 어지러이 갖지 마라. 앞길에도 종종 기회가 있으리니. (중략) 배와 수레가 어디서든 나루에 아니 닿을까.’ 당장은 힘들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면 언젠가는 기회를 만나게 될 거라며 청년들을 격려하는 메시지다.

광개토왕비체로 쓴 ‘관기소불위(觀其所不爲)’는 은퇴한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다.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처지가 비천해졌을 때 그 사람이 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보라는 것이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4층 전시장의 벽 하나를 차지한 가로 12m, 세로 2.4m의 대작 ‘山居志(산거지·산에 사는 뜻)’. 전문 385자의 글을 준비하는 데 6개월, 쓰는 데는 2시간30분 걸렸다고 했다. 갑골문체, 금문체, 한간체, 광개토왕비체 등 온갖 서체를 섞어서 썼다. 하석은 “60년 가까이 익힌 서체를 다 녹여 손 가는 대로 썼다”고 했다. 뭉뚱그리면 ‘하하옹수수체’다.

딱 한 글자를 쓴 ‘칩()’은 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다. 이 글자는 ‘뒷발목 얽어맬 칩’이다. 천리마의 뒷다리를 묶어놓으면 뛸 수 없다는 뜻. 하석은 “불필요한 규제와 시기심으로 인재의 뒷다리를 잡지 말고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석은 전시장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차림으로 나왔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틀에 옛것을 적용하는 신체구용(新體舊用)이다. 커피와 맥주를 전문가 수준으로 즐기고, 골프·수영 실력도 아마추어를 넘어선다. 판소리 고수로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든다니 ‘하하옹’인지 ‘하하오빠’인지 헷갈릴 정도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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