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황당한 계몽군주론

입력 2020-09-27 18:19   수정 2020-09-28 00:15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국민들은 “집권하면 10년 안에 독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확 바꿔놓겠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공약’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것에 망연자실했다.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파괴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접한 그들은 공포 속에 숨을 죽였다.

전장의 포성이 점점 베를린으로 다가올 때, 지하벙커 속에 웅크리고 있던 독재자 히틀러는 사무실 한쪽에 걸려 있던 ‘프리드리히 대제’(1712~1786년)의 초상화를 응시하며 기적이 일어나기만 바랐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7년 전쟁’(1756~1763년) 당시 패전 위기에 처했을 때 적국 러시아의 군주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급서하면서 러시아군 진격이 멈췄던 전례가 되풀이되기를 꿈꿨던 것이다.

히틀러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롤 모델로 삼았다는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과 함께 ‘계몽전제군주’의 표상으로 불린다.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계몽주의 원칙에 따라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계몽전제주의는 ‘계몽군주가 신민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지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의 최우선 관심사는 무지와 편견과 싸우는 것이다.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백성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겠다”고 강조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영향을 크게 받아 유럽 주요국 중에서 처음으로 고문(拷問)을 폐지했다. 빈민에 대한 곡물 대여와 감자 재배 장려, 검열 폐지 등의 조치도 취했다. 유대인 학살 등 각종 반인륜적인 행위를 일삼았던 히틀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결이 다른 인물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피살되고 시신이 불타는 참극이 발생한 데 대해 김정은이 사과 통지문을 전한 것을 두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김 위원장은 계몽군주 같다”고 떠받드는 발언을 해 논란을 자초했다. 사람을 죽여도 ‘미안하다’고 하면 곧바로 칭송 대상이 될 수 있는지, 김정은이 인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뭘 했는지, 북한의 처참한 인권 상황은 안 보이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고모부와 이복형을 죽인 독재자를 두고 뜬금없이 ‘계몽군주’를 소환하는 것은 히틀러가 자신과는 상반된 행적의 프리드리히 2세 초상 앞에서 구원을 꿈꿨던 것만큼이나 기괴한 장면이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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