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몰염치와 후안무치

입력 2020-10-06 17:52   수정 2020-10-07 00:20

조선 세조 때 충청도 관노가 부친과 조부의 땅을 영의정 황수신에게 빼앗겼다고 호소했다가 거꾸로 옥에 갇혔다. 조사에 나선 사헌부가 “황수신이 실제로 땅을 빼앗았다”고 보고했지만, 세조는 “죄가 없으니 다시 거론 말라”고 했다.

사헌부가 “예·의·염·치(禮·義·廉·恥)의 네 가지 근본이 없으면,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며 나라는 그 나라가 아니니 진실로 두려운 것입니다”라며 그의 처벌을 재차 요청했지만 세조는 자신의 집권을 도운 공신이라는 점을 들어 황수신의 죄를 더 이상 묻지 말라고 명했다.

‘염치(廉恥)’라는 단어는 《조선왕조실록》 원문에 1514번이나 등장한다.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곧 염치다. 부끄러워할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으로 이뤄진 글자다. 귀를 막고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뻔뻔한 것을 몰염치(沒廉恥), 그런 사람을 파렴치한(破廉恥漢)이라고 한다.

염치없는 정도를 넘어 낯가죽이 두껍고 뻔뻔함이 도를 넘는 경우에는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표현을 쓴다. 요즘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대통령의 취임사와 달리 공정과 정의의 가치는 더 훼손되고, 권력 실세들의 제 식구 챙기기는 더 심해졌다.

명색이 국가 대사를 좌우하는 국무위원들이 무슨 의혹만 제기되면 ‘가짜 뉴스’라고 잡아떼고,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면 ‘재판에서 밝히겠다’고 하고, 법원에서 밝혀지면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사생활 제한을 감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장관이 자기 가족은 예외로 여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국민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한 군대와 적국 수장의 눈치부터 살피는 장관의 갈팡질팡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러니 추석 연휴에 곳곳에서 민심이 들끓고 ‘파렴치한의 나라’라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냐?”며 울부짖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이가 너무 많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던 관노의 심정도 이랬을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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