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4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체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초기부터 가야는 물론 왜 세력의 침공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학자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늦게 발전한 원인을 영역이 동남부 내륙지방에 국한돼 고립됐고, 수도가 교통이 불편한 분지였다는 데서 찾는다.
수도인 경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큰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가 우물과 관련된 여인(水神)과 결혼해 건국한 땅이다. 이런 신령성 때문에 ‘금성(金城·신령스러운 도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경주는 실제로는 지정학적이고 지경학적인 가치가 풍부했으며, 이는 해양 활동과 깊이 연관돼 있다.
또 경주권과 연결되는 태화강은 48.5㎞를 흐르다가 서생포 등의 포구들이 발달한 울산만으로 들어간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4대 임금인 석탈해(昔脫解)는 왜국의 동북 1000여 리 떨어진 다파나국(多波那國)에서 출발한 상자 속에 넣어져 울산 지역인 아진포(阿珍浦)에 들어왔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슬람 상인으로 추정되는 처용과 연관된 개운포와 처용암도 울산만에 있다. 이처럼 경주는 육로 교통은 불편하지만 강을 이용한 내륙 수로교통과 연결된 동해 남부에 훌륭한 외항들을 갖고 있는 해항 도시였다. 이 때문에 신라는 초기부터 해외로 진출했고, 외지 사람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우호적인 이 왜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 열도의 혼슈 일대에 진출했다. 동해 중부에서 출항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형지물로 활용하면서 횡단하거나, 동해 남부에서 출항해 해류를 타고 바람을 이용하면 혼슈 남부 해안지방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에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영일만 지역과 이즈모 지역은 동일하게 북위 35.5도 선상에 있으므로 교류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동해와 남해 근처 해역에서 표류병을 투하한 실험 결과를 보면 겨울에는 약 40%가 시마네현 해안에 도착했다. (일본전국연안해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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