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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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0-19 09:00  

倭의 침공 맞서 해양력 강화한 신라…삼국통일의 토대 쌓았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린 신라 왕자인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또는 天之日矛(천지일모))’가 8개(또는 7개)의 보물을 갖고 도착해 활동한 지역들이다. 일본 신화에서 가야계인 태양여신과 격돌을 벌인 해양과 폭풍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계다. 그는 패배한 뒤 근국(뿌리 나라)인 신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신라국에서 흙배를 타고 이즈모에 내려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계의 일본 진출

시마네현 이즈모의 고진타니 유적에서는 358개의 청동칼이 나왔고, 청동창, 동탁(제사용 방울) 등의 금속제품들이 출토됐다. 신라에서 제철(製鐵) 집단이 진출했고, 이들이 철광산을 발견하면서 대량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생산했으며, 거대한 고분군들이 증명하듯 소국들을 세웠다. 결국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시마네현 주민들은 신라인 피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왜인의 침입은 상세하게(?) 기록한 반면 신라인의 진출은 기록을 안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와 자존심을 왜곡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는 157년에 근오기(영일만)에 거주하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일본 땅에서 소국의 왕과 왕비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사연이 담긴 이 신화는 중앙정부와 갈등을 일으킨 ‘해와 달’을 숭배하는 제사 집단이 혼슈 남부의 이즈모 지역으로 진출했으며, 계속 교류한 역사를 알려준다.
신라를 침공한 ‘규슈 倭’
해양 진출에 유리한 경주를 둘러싼 해양 환경은 양날의 비수처럼 때로는 왜의 침략을 야기했고, 신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2대 남해왕 때 왜인들이 100여 척의 배로 영일만 지역을 침범했다. 233년에 신라는 해상에서 왜와 화공전까지 벌였고, 295년에는 백제와 공모해 왜국을 치려고 했으나 중지했다. 왜병은 실성왕 때인 405년에 경주의 명활성까지 공격했고, 다음해에는 해안을 공격했다. 그러자 실성왕은 408년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실천은 못했다. 왜는 444년에 수도인 금성을 10일 동안 포위했고, 459년 4월에는 100여 척으로 공격하고, 수도의 월성(月城)을 포위했다. 이어 낙동강 하류인 양산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했다.

이런 자연환경과 현실 속에서 신라는 수군을 양성하고 활용해야만 했다. 석탈해의 수군들은 가야의 선단(船團)과 낙동강 하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209년에는 남해안 일대의 8개 도시국가들(浦上八國)이 김해 지역을 공격하자 군사를 파병해 가야를 구원했다.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으며, ‘선부(船府)’라는 전문 관청을 설치했다. 이뿐만 아니라 수도권 요소요소에는 해양 방어체제를 구축해 463년에는 성 2개를 쌓았으며, 493년에는 군사기지인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왕성이 경주처럼 해안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적당하게 먼 거리이고,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도시가 아니었다면, 신라는 거듭된 왜의 해양 공격에 존속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고구려·백제·가야도 신라 압박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가야나 백제가 아니라 유독 신라 지역만을 공격한 이 왜병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대에는 해양환경에 따라 정치 군사 외교 등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통계를 보면 왜병들은 주로 남풍이 부는 봄철에 침입했다. 남동풍이 불 때 규슈나 대마도에서 배를 띄우면 북동진하는 해류(쿠로시오해류)와 조류를 타고 울산, 포항 등 동해 남부에 도착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를 수십여 차례 공격한 왜는 규슈 지역에 바탕을 둔 가야, 백제와 연관이 깊었으며, 혼슈의 친(親)신라계 왜와는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4세기 말부터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해 장수왕 때인 481년에는 안동, 청송, 울진, 영해 등을 영토로 삼았고, 포항시인 흥해까지 공격했다. 또 백제와 가야, 왜는 해양외교를 성사시키면서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신라는 해양 능력의 강화라는 시대의 필요성과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고, 산골의 강인함과 농토의 순박함에 해양의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행동을 조화시켰다. 그 결과 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양 활동은 새롭게 발전했고, 이는 삼국 통일의 토대가 됐다.
√ 기억해주세요
4세기 말부터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했고 백제와 가야, 왜는 해양외교를 성사시키면서 신라를 압박하고 공격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신라는 해양 능력의 강화라는 시대의 필요성과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결과 6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양 활동은 새롭게 발전했고, 이는 삼국통일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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