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자료 444개 삭제하고도 '적극행정 면책' 신청한 공무원

입력 2020-10-21 17:31   수정 2020-10-22 00:45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감사 과정에서 자료 444개를 삭제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과 이를 지시한 담당 국장은 감사원 처분 결정이 내리기 전 감사원에 적극행정 면책을 신청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적극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면책제도의 근본 취지를 망각한 황당한 신청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 공무원 A서기관은 2019년 11월 초 감사원이 ‘월성 1호기 조기폐쇄’와 관련해 감사를 시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시 전 상관이었던 B국장에게 연락했고 B국장은 A서기관에게 관련 자료 삭제를 지시했다. A서기관은 감사 하루 전이자 일요일인 12월 1일 밤 사무실로 출근해 자료를 삭제했다. 2시간이 안 되는 동안 삭제한 서류는 444개에 달했다. 심지어 포렌식 등으로도 파일을 복구할 수 없도록 파일 내용과 제목을 수정, 저장한 뒤 삭제했다.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관련 청와대 보고 서류 등 민감한 자료들이었다.

이 같은 감사 방해는 상사가 지시하고 부하 직원이 수행한 조직적이고 악질적인 증거 훼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감사원은 이들의 면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사원은 “신청내용이 면책요건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적극행정면책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면책을 불인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적극행정 면책제도는 공직자들의 적극적인 업무 수행 중 불가피하게 발생한 잘못에는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도입됐다. 이는 국가 또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거나 그 업무를 추진해야 할 필요성과 타당성이 인정되는 경우 등으로 제한된다. 감사를 방해한 비리 공무원을 감싸는 데 악용돼선 안 된다.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극단적이지만 근본적이지 않은 ‘악의 평범성’을 강조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처럼 나쁜 행위를 저질렀지만 행위의 동기는 평범할 수 있다는 게 아렌트의 결론이다. 그 동기는 상사의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었다. 악이 평범한 이유는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렌트는 강조했다. 조직논리에 따라 자신의 말과 생각을 잃어버린 공무원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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