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근대 이후 100여 년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다. 35년의 긴 식민지 생활을 자초했고,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자기파멸을 시도하면서 죽음과 폐허, 가난을 남겼다. 그런데 또 50여 년 만에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김이사부’라는 20대 초의 젊은 왕족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배 이물(앞머리)에 나무를 깎아 세운 사자로 위협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 해양소국을 점령했다. 그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주(自主) 획득과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동해 중부 횡단 항로를 빼앗겼고, 반대로 신라의 해양활동 범위는 확장됐다.
뒤를 이어 540년에 조카인 진흥왕이 임금이 됐다. 7세였으므로 19세까지 어머니가 섭정을 했는데, 그녀는 김이사부와 재혼한 사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이사부는 다음 해에 병부령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각간이며 상대등으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562년까지 활약한 그는 신라를 마침내 강대국의 반열에 올리고, 훗날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만든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신라는 548년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했다.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충남 지역을 놓고 1년 이상 전투를 벌이는 혼란을 절묘하게 이용해 이 지역을 차지했다. 나아가 551년에는 고구려가 돌궐과 랴오둥지역의 백암성 등에서 전투를 벌일 때를 이용, 한강 상류인 죽령(소백산맥) 이북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탈취했다. 1978년에 단양군 적성면의 남한강가 언덕에서 돌비가 발견됐다(단국대 정영호 교수팀). 비문에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사실과 김이사부를 비롯한 공훈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