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난민·살인물가…일상이 된 위기 앞엔 '덧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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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0-23 17:17   수정 2020-10-24 02:19

실업·난민·살인물가…일상이 된 위기 앞엔 '덧없는 사랑'


2010년대 초반의 아테네. 카메라는 세 쌍의 연인을 순차적으로 비춘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경제위기’와 ‘유럽 난민 사태’라고 부르는 두 사건 속에 살아가고 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다프네는 귀갓길에 난민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자신을 구해준 난민 청년 파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위태로운 결혼과 매각 직전인 회사 상황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지오르고는 자신의 회사를 구조조정하러 온 스웨덴인 컨설턴트 엘리제와 불륜 관계를 맺는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가족을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60대의 가정주부 마리아. 그는 매주 찾는 슈퍼마켓에서 독일인 역사학자 세바스찬을 만난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2015년 개봉한 그리스 영화다. ‘스파이더맨’과 ‘위플래쉬’로 익숙한 할리우드 배우 JK 시몬스가 세바스찬을 연기해 화제가 된 이 영화는 2015년 그리스에서 할리우드 개봉작을 뛰어넘은 최대 흥행을 기록했고, 비평가들의 호평에 힘입어 2017년에는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영화는 그리스 경제·사회적 불안의 한복판에 관객들을 던진다. 스크린 속 아테네 길거리에는 실업자와 난민이 가득하다. 파리스는 폐쇄된 공항의 난민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지오르고의 회사는 전체 임직원의 35%를 해고한다. 엘리제는 경제위기 이후 슈퍼마켓에서 토마토와 치즈조차 살 수 없게 됐다며 투덜댄다.
문명의 원천 그리스가 위기에 빠진 이유
세바스찬이 ‘전 세계 문명의 원천’이라고 칭송한 그리스는 어쩌다 이토록 지옥 같은 풍경으로 변했을까. 경제학자들은 그리스 경제위기 원인의 상당 부분을 유로존 내 그리스의 위치에서 찾는다. 그리스의 경제위기는 유로존 가입으로 촉발된 측면이 있고, 위기 이후에도 유로 회원국이라는 사실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는 평가다.

유로존은 애당초 21세기 시작과 함께 펼쳐진 유럽 대륙의 거대한 경제실험의 산물이다. 그 시작은 ‘유로화의 아버지’ 로버트 먼델이 1961년 내놓은 ‘최적통화지역 이론’이다. 먼델에 따르면 두 지역 내 노동 등 생산 요소의 이동이 자유롭고, 상품의 가격과 임금의 신축성이 동일하며, 경제위기에 따른 충격이 대칭적일수록 화폐 통합의 편익은 최대화되고 비용은 감소한다. <그래프 1>처럼 경제 통합 정도가 높을수록 단일통화의 이익(GG곡선)은 우상향하고, 비용(LL곡선)은 우하향하는 구조다. 먼델의 이론은 유럽통화연맹과 이후 유로존 탄생에까지 강력한 근거로 작용했고, 먼델은 화폐통합 연구로 199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가까운 듯 먼 그리스와 유럽
유로화의 초창기였던 21세기 초반 당시만 해도 유로존은 순조롭게 성장을 이어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2년 본격적인 유로화 도입 이후 2007년까지 유로존의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97%로, 같은 기간 미국과 일본의 성장률을 뛰어넘었다. 그리스도 유로존 평균을 넘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문제는 유럽이 ‘최적통화지역 이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2000년 유로존 가입 이후 순식간에 국가신용도가 독일이나 프랑스 등 경제대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상승한다. 채권자들은 그리스가 경제위기를 맞더라도 유로존의 다른 국가들이 그리스를 지원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하기 전인 2000년 2월 당시 독일과 그리스의 국고채 10년물 금리차는 1%포인트가 넘었다. 8년 뒤인 2008년 2월, 이 차이는 0.4%포인트까지 좁혀진다. 전통적으로 공공부문의 경제 비중이 큰 그리스는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낮아진 차입비용을 적극 활용해 재정지출을 크게 확대했다.
그리스 고통 공감 못 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가 일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정책으로는 크게 환율정책, 통화정책, 재정정책이 있다. 만일 그리스가 유로가 아니라 기존의 자국 화폐였던 드라크마를 사용했다면 그리스 정부는 대폭적인 평가절하와 함께 금리를 낮춰 경기부양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유로존에 소속된 국가들은 환율정책과 통화정책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리스 정부는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펼치기에는 재정적자 누적액이 너무 컸다.

번영기에 그리스와 함께했던 유럽의 이웃들은 위기 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바스찬은 유로존 도입의 최대 수혜국인 독일 출신이고, 엘리제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고도 유로존에는 편입하지 않은 스웨덴 출신이다. 이들은 각각 그리스인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온전히 그리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 실제로도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존 전체 GDP의 2%에 불과한 그리스를 위해 금리를 낮추거나, 환율을 조정하려 들 수 없었다. 당시 그리스는 이탈리아와 함께 유로존 내에서는 예외에 가까웠다. 그리스 경제가 -5.47% 성장했던 2010년, 유로존은 오히려 2.13% 성장했다.

결국 그리스 경제위기는 유럽 국가 간 노동력 이동이 실제로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자유롭게 이뤄지지 않았고, 외부 충격에 대한 반응도 각기 달라 유럽의 화폐 통일로 인한 비용이 편익보다 클 수 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또 한 명의 석학인 폴 크루그먼은 2012년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유로화는 끔찍한 실수”라며 “그리스는 유로존에 남아 잔혹한 긴축을 감당하기보다 차라리 떠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위대한 실험’은 완전한 실패일까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서로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던 세 커플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은다. 마리아가 다프네와 지오르고의 어머니로 밝혀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과도 같이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다프네는 그리스 내 파시스트 운동가들이 난민들을 기습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친구가 쏜 총에 사망하고, 아들 지오르고는 회사의 구조조정에 포함돼 실직 후 이혼한다. 딸을 떠나보낸 마리아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국가를 초월해 유럽과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고자 했으나 결국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개별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진 그리스처럼, 언어와 국가라는 장벽을 넘고자 했던 세 그리스인의 사랑은 언어와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스는 세 차례의 구제금융을 받고 경제위기를 탈출하지만 오늘날까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리스의 실업률은 올해 상반기 기준 유럽 내 최고 수준인 18.3%에 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그리스가 여전히 유로존 내에서 가장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국가라며, 올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그리스 경제가 작년 대비 -9.5%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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