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임직원 앞에서 전화기 15만대 불태워…"質은 포기 말라"

입력 2020-10-25 10:30   수정 2020-10-25 13:28


1993년 6월5일 일본 도쿄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1등석. 이건희 회장은 이륙 후 골똘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몇 시간쯤 지나 수행 임원들을 불렀다. “일본인 고문이 올린 보고서를 봤는데 ‘삼성 사람들은 상품을 디자인할 때 A안, B안, C안은 출발부터 개념이 다른데도 윗사람들은 적당히 섞어서 제품을 만들라고 지시한다.’, ‘느닷없이 디자인을 사흘 안으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공장에서 콘센트가 발에 걸리적 거려도 정리할 생각을 않고 무심히 지나친다. 이런 기본적인 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돼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회장이 언급한 보고서는 당시 삼성전자 고문이었던 후쿠다씨, 기보씨가 작성한 것이다. 후쿠다 보고서는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이며 기보보고서는 사업장의 정리정돈 및 청결 상태 등 기본에 관한 사항이었다.

말문을 연 이 회장은 삼성 변화·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기내에서 7시간 동안 쉬지않고 얘기했다. 그의 말은 숙소인 켐핀스키 호텔로 이어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다음날 아침 삼성사내방송(SBC)팀이 만든 30분짜리 비디오가 전달됐다.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자 근로자들이 칼로 깎아내는 장면을 본 이 회장은 격노하며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질경영을 그렇게도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이건희 회장의 트레이드마크 ‘신경영’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히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니라 십년 이상 후계자 수업을 받고, 회장직을 5년을 하고 나서 쌓였던 고민과 열정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한 말에 그런 뜻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경영은 어떤 것이길래 삼성은 그후 대변신을 거듭,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났을까.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든 이 회장의 경영학에 대해 6회에 걸쳐 분석해본다.

① 변해야산다
기업은 변화, 개혁을 부르짖는다. 바뀌지 않고선 변화에서 도태돼서다. 디지털화 대응이 늦어 뒤처진 소니, 스마트폰 폭풍이 휩쓸려 난파한 노키아 등이 좋은 사례다.

그렇지만 이 회장이 달랐던 점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의식부터 바꾸자’는 데 있었다. 제도 변경으로 개혁을 시작한 게 아니라, 의식 구조란 근원을 바꾸는 데 부터 접근한 것이다. 이 회장은 “이기주의만 없애고 단합이 되고,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든 이 지구상에선 일등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 변할 수 있다 △정도를 걷자 △뒷다리를 잡지말자 △비판을 두려워말자 등 의식 개혁에 나섰고, ‘한 방향으로 가자’며 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은 단 번에 기업문화가 바뀌는 게 쉽지않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 회장이 부르짖는 변화는 일종의 문화혁명 같았다”고 말했다.

또 제도적인 뒷받침에 나섰다. 1993년 8월 전격적으로 ‘7·4제’를 실시했다. 아침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하는 이 제도는 회장의 개혁 철학을 임직원이 체감토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1995년 공채에서는 파격적으로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성차별 해소를 위해 여사원 근무복 없앴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했다. 1994년 말 문을 연 삼성의료원은 한국의 영안실 문화를 확 바꿨다. 이같은 변화는 점차 재계로 확산됐다.
② 질경영
이 회장은 지속적으로 ‘품질경영’을 주문했다. “세계일류가 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난다. 1년간 회사 문을 닫더라도 불량률을 없애라”고 했지만 삼성 조직은 꼼짝하지 않았다. 60~70년대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시절을 겪은 경영진에겐 ‘어떻게든 많이 만들면 된다’ ‘양이 최고다’란 의식이 뿌리깊었다.

1993년 6월15일 이 회장은 “질로 가서 점유율이 떨어지고 적자가 나도 좋다. 적자가 나면 내 사재라도 털겠다”며 10여 시간이 넘게 강의했다. 강의 직후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이 여러 사장과 함께 이 회장 방을 찾아왔다. “회장님, 아직까지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참석자들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른바 ‘스푼사건’이다.

이 때부터 본격화된 질경영은 ‘불량제품 화형식’으로 삼성 임직원에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그 해 3월9일 수거된 15만대의 전화기를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았다.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명이 전화기를 내리쳤고, 산산조각난 전화기를 불구덩이에 쳐넣었다. 잠자는 사람에게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는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1994년 4위에 그쳤던 삼성 무선전화기의 국내 점유율은 1995년 점유율 19%로 1위에 올랐다.

삼성이 갤럭시S 시리즈로 초일류 기업이 된 것도 이같은 질경영에 기초한다. 작년 5월 갤럭시S3가 출시되기 3주 전, 뒷면 커버의 질감이 초기 기획단계때보다 일부 낮았다. 10만개의 커버가 생산된 상태였고, 수출을 앞둔 갤럭시S3가 비행기에 실려있었다. 이번에는 화형식은 없었지만 10만개의 재고는 모두 폐기되고 교체됐다.
③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
이 회장은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를 강조했다. 정보화, 국제화는 지금은 보편화된 것이지만, 당시에는 초기에 불과했다. 이 회장은 “1980년대에는 국내에서 챔피언이면 챔피언이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챔피언이라야 챔피언이다”라며 국제화를 강화했다.

주목할 것은 복합화에 대한 생각이다. 이 회장은 복합화를 ‘누운 것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장, 식당, 집 등을 100층 짜리 빌딩에 모아놓으면 효율이 커질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 회장은 “100층이든 80층이든 빌딩에 기획, 디자인, 설계, 판매 등 각 조직 담당자가 모두 입주해있다면 필요할 때 40초면 회의실에 모일 수 있다”고 빌딩 복합화의 예를 들었다. 복합화는 빌딩뿐 아니라, 도시 공장 병원 등에도 다 적용된다.

삼성이 수원, 화성, 아산 등에 대규모 용지를 확보한 뒤 공장과 연구시설, 병원, 학교 등을 넣어 대단위 복합단지로 개발한 것은 이 회장의 이같은 발상에서 비롯됐다. 복합화된 대단지를 이룬 삼성은 제품 개발, 양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다.

송형석/황정수/이수빈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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