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햇살, 산기슭의 물, 섬진강 안개를 먹고 자란 하동차. 4월 초 어린잎만 수확해 아랫목에서 말린 ‘잭살차’ 몸 아프면 배·모과 넣고 팔팔 끓여 마시던 상비약. 조선시대엔 궁에 진상하던 ‘왕의 녹차’. 차 마실에 몸이 따뜻해지면, 휘영청 달 마중을 떠나자~
하동은 한국에서 차를 처음 심은 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서기 828년) 때 당나라에서 들여온 차 종자를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고 한다. 그때의 차가 섬진강의 안개를 먹고 하동차가 됐다.
4월 초 곡우와 입하 사이에 올라오는 어린잎만 수확해 시들게 한 뒤 비벼서 그늘이나 아랫목에서 발효시킨 차를 이곳 사람들은 ‘잭살차’라 부른다. 동네 사람들은 한지에 잭살을 싸서 매어두고 몸이 아프면 배나 모과를 넣어 상비약처럼 팔팔 끓여 먹기도 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하동차는 조정에 진상돼 ‘왕의 녹차’라는 타이틀까지 붙었다. 차 품질에 관한 한 고려시대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 만들어지는 안개와 햇살, 여기에 집집마다 이어진 덖음 기술(제다법)이 더해져 명차가 탄생한 것이다.
차 한잔을 할 때마다 곶감이나 다과, 꿀에 잰 단밤 등이 간식거리로 같이 나온다. 차 한잔에 온몸이 따뜻해지고 간식거리로 입안이 달달해진다. 차밭 아래로 바람이 스쳐갈 즈음 젊은 국악인의 해금 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차를 매개로 한 생활여행 플랫폼 ‘다포(茶布)’는 마을사람들이 주축인 주민 여행 플랫폼이다. 마을에서 차 좀 만든다는 사람들이 품을 들여 여행자들을 맞는다.
잭살, 모과, 돌배, 유자를 섞은 발효차 유자병차로 유명한 한밭제다의 이덕주 씨, 대나무통 녹차 발효로 특성화된 혜림농원의 구해진 씨, 엄마의 젖맛 같은 차를 추구하는 유로제다의 엄옥주 씨, 독특한 ‘민황(悶黃)기술’로 생차와 발효차의 장점을 모두 갖춘 차를 만드는 무애산방의 이수운 씨, 야생차나무를 주로 이용하는 관아수제차의 김정옥 씨 등이 그들이다. 민황이란 열처리가 끝난 찻잎을 종이나 천으로 싸 습도와 온도만으로 약하게 발효시키는 기술이다.
날이 저물면 섬진강 달마중이 이어진다. 보름달 밤이면 마을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횃불을 들고 강변 백사장으로 나와 이슥하도록 놀았던 풍습에서 착안한 것이다.
호야등(남포등)을 든 여행자와 주민이 섬진강변으로 모이면 어느새 달빛이 휘영청 은빛 비늘을 떨군다. 백사장에 앉아 지역 명창의 공연을 보고 문인이 들려주는 시 한 구절을 들으며 가을 달밤의 낭만 속으로 빠져든다. 준비된 프로그램이 끝나면 대형 황금색 인공 달 앞에서 여행자들이 검은 형체 실루엣 사진을 찍으며 달마실의 여운을 즐긴다. 어느새 별이 하나둘씩 가슴으로 떨어졌다.
하동=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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