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숙 "시력 잃어가지만…무대 없으면 안되는 몸"

입력 2020-11-08 17:04   수정 2020-11-09 00:37


“배우한테 연기하지 말고 쉬라는 건 죽으란 소리죠.”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배우 손숙(76·사진)은 신작 ‘저물도록 너, 어디있었니’에 출연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연극하고 싶은 갈증이 늘 있었다”고 했다.

‘연극계 대모’ 손숙. 그가 50년 쌓은 연기 내공을 다시 풀어놓는다. 오는 19일부터 열흘 동안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펼쳐지는 ‘저물도록 너, 어디있었니’를 통해서다. 9개월 만에 연극판에 돌아온 그는 이번엔 오랜 세월 함께한 ‘거장’들과 호흡을 맞춘다. 한태숙 경기도극단 예술감독(70)이 연출을, 원로 작가 정복근(75)이 희곡을 맡았다. 셋의 연극 경력을 합치니 150년을 헤아린다. 경기도극단 단원 18명이 손숙과 함께 열연을 펼친다.

손숙은 동료 배우들 이야기를 빌려 ‘사명감’을 말했다. “최근 정동환 씨가 나온 연극을 봤는데 ‘저 인간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몸 생각 안 하고 물에 뛰어드는 열연을 펼치더라고요. 신구 선생님도 ‘배우가 연기 안 하면 죽는 거다’라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저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작품은 극 중 고위공직자 부인 ‘성연’이 민주화 운동을 하러 떠난 딸을 찾는 과정을 담았다. 광복 직후와 혼란스러웠던 1980년대를 오가며 “존재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손숙은 소설가 ‘지하련’ 역을 맡았다. 지하련은 월북 시인 임화의 부인이다. 임화가 1953년 간첩 혐의로 몰려 처형당한 뒤 남편을 찾아 방황하다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이다. “참고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인물을 해석하는 데 애를 먹었어요.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았죠. 시대가 낳은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습니다.”

한 감독과의 호흡은 거의 13년 만이다. 손숙은 1997년 한 감독이 연출한 연극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에서 주연을 맡았다. 서울에서 주로 무대에 오르던 그가 지방극단과 공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한 감독은 “강렬한 인상을 갖춘 배우를 원했다”며 “단원들도 손숙 씨에게 많은 걸 배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연기 연습은 고행에 가까웠다. 손숙은 오래전부터 시야가 혼탁해지는 황반변성을 앓고 있다고 했다. “활자 중독일 만큼 책을 좋아했는데 5년 전쯤 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어요. 마치 눈에 얇은 장막이 낀 것처럼. 의사가 황반변성이라고, 왼쪽 눈은 치료할 방법이 없어 심하면 실명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연습 때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대본을 읽어 달라고 했어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연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다시 사명감을 이야기했다. “지인이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고, 마음이 아프면 극장에 가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요. 누군가 내 연기를 보고 위로받거나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성장’은 또 다른 이유다. “연극 한 편 올릴 때마다 자라나는 기분이 듭니다. 사람을 분석하고 파악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작업은 웬만한 대학교 박사 못지 않죠.”

연극에 애정이 깊어서인지 후배 배우들이 ‘아픈 손가락’이라고도 했다. 고단한 길을 걸어갈 게 눈에 보여서다.

“가끔 후배들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또 제 정신인가 싶기도 해요. 배우 생활 힘들 게 뻔하잖아요. 하지만 어떤 감정인지 알죠. 저도 연습실 들어가면 늘 설렙니다. 배역을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서려고 합니다. 출연료 받으면 후배들 밥 사줘야죠. 하하.”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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