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보수 가치'가 패배한 건 아니다

입력 2020-11-10 17:53   수정 2020-11-11 00:31

미국 정치평론가들은 공화당과 도널드 트럼프의 관계를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와의 거래’에 비유해왔다. ‘보수 본산’ 당의 정체성을 대표하면서 대중적 흡입력도 갖춘 간판 인물을 찾지 못하자 타협적 대안(代案)으로 트럼프를 골랐다는 것이다. 공화당은 그렇게 찾아낸 트럼프를 내세워 4년 전 선거에서 민주당을 제치고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의 기존 ‘정치문법’을 깨뜨린 파격적 행보는 공화당에 ‘양날의 칼’이었다. 번지르르한 연설과 그럴듯한 매너로 무장한 ‘진보엘리트’들의 위선에 지치고 싫증나 있던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데 꽤 효과를 냈다. ‘미국 우선주의’ 기치를 내걸고 일자리 확대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내놓은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난주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에게 패배하며 4년 만에 ‘대권’을 내주게 됐다. 트럼프가 품격과 절제를 찾기 힘든 언행에 ‘코로나 대응 능력 부재’ 논란에까지 휩싸인 게 패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를 물리친 민주당이 의회선거에서는 패배한 것이다. 상원은 여전히 공화당이 다수당을 유지할 게 확실하고, 하원에서도 민주당 의석이 상당수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역대 선거에서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미국 유권자들은 새 대통령을 선출할 때 소속 정당에 상·하원 다수의석도 몰아줘 대선공약을 제대로 이행할 길을 터줘 왔다. 12년 전의 버락 오바마, 4년 전의 트럼프 당선 때도 그랬다. 민주당의 두 의회 지도자(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가 “이번 선거 최대의 패배자”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선거에서 미국 곳곳에 ‘블루 웨이브(민주당 지지물결)’가 출렁이면서 민주당이 상·하 양원에서도 크게 약진할 것이라던 주요 언론과 전문가들의 일치된 예상이 ‘부도’를 낸 것이다. 공화당의 상·하원 출마자들에게 이번 선거는 악전고투(惡戰苦鬪)의 무대였다. ‘품격 실종 트럼프’가 큰 악재였던 데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등 미국 미디어의 주류를 장악한 좌파 ‘동부언론’들은 민주당의 의회 석권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다. 선거를 치르는 데 필수적인 ‘실탄’에서도 민주당 후보들에게 크게 밀렸다. 민주당에 ‘보호비(protection money)’를 바친 상공회의소를 비롯해 ‘블루웨이브’ 눈치를 본 기업인들의 돈이 압도적으로 민주당에 몰렸다. 상원 선거 경합이 치열했던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이 긁어모은 자금이 공화당보다 2~3배 많은 1억달러로 ‘전대미문’의 규모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런 민주당에 쓴맛을 안겨준 미국 유권자들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 미국인들이 트럼프 대통령 재신임을 거부했다고 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히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그 요인을 민주당 지도부의 노골적이고도 지나친 좌경화(左傾化)에서 찾는다.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높여 대기업과 고소득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고 환경 에너지 등 분야의 기업 활동을 옥죄며, 공립대학 등록금을 없애겠다는 등의 대중인기영합적 공약에 유권자들이 거부감을 분명하게 표시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거칠고 엉뚱한 리더십을 심판했을 뿐, 그와 공화당의 경제정책에 합격점을 주고 있음은 최근의 갤럽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4년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느냐”를 물은 항목에 대한 응답률 56%는 로널드 레이건(44%), 조지 W 부시(47%), 버락 오바마(45%)가 연임에 도전하던 해의 응답률보다 훨씬 높았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두 축으로 삼은 공화당 정책이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저소득층에까지 큰 파급효과를 미쳤음은 통계가 증언한다. 코로나 사태 직전 흑인들의 실업률이 통계 분류를 시작한 1970년대 이후 가장 낮은 5.4%로까지 떨어진 게 단적인 예다. 흑인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민주당) 시절에는 이 수치가 7.5%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대통령으로 바이든을 골랐을 뿐 ‘좌파 아젠다’에 확실한 견제장치를 걸어둔 미국 유권자들의 결정이 절묘하다. 공화당이 보수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확고한 정책을 지속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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