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와 우향 애틋한 사랑, 부부화가를 만나다

입력 2020-11-18 17:20   수정 2020-11-18 23:54


우향 박래현(1920~1976)이 운보 김기창(1913~2001)을 처음 만난 건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 서울에서였다. 작품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우향은 시상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운보의 그림에 반해 집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우향은 운보의 젊고 훤칠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얀 원피스에 흰 구두를 신은 우향을 본 운보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하지만 운보는 망설였다. 우향은 전북 군산 대지주의 딸로 일본 유학까지 한 신여성, 운보는 가난한 데다 청각장애까지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 운보에게 우향은 “그림을 배우고 싶은데 편지를 해도 되느냐”며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군산에서 매주 굴비 선물을 보내고 남산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3년 후 우향은 “함께 살자. 대신 그림만 그리게 해 달라”고 졸라 결혼에 골인했다. ‘부부 화가’의 탄생이었다.

금슬이 도타웠던 두 사람은 1947년 첫 부부전 이후 12차례나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하와이 호놀룰루, 워싱턴DC 등 해외 부부전도 열었다. 두 사람은 창작의 길을 함께 걸은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우향과 운보 부부전이 다시 열리고 있다. 서울 압구정로 청작화랑의 ‘우향 박래현 판화전 WITH 운보 김기창’이다. 청작화랑은 운보가 살아 있던 1988년의 ‘부부전’과 2018년의 우향 42주기 판화전에 이어 또다시 부부전을 마련해 두 거장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우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과 함께 그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번 전시에는 우향의 동판화 작품 23점과 운보의 ‘바보산수’를 비롯한 한국화, 도자기 등 8점까지 총 31점을 내놓았다. 동판화는 우향이 암으로 타계하기 전 6년간 뉴욕에서 열정을 불태우며 제작한 것이다. 우향은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방문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뉴욕의 블랙번 판화공방에서 판화와 태피스트리 작업에 몰두했다. 1974년에 연 귀국 판화전은 한국 미술계에 놀라움을 선사했으나 2년 후 갑자기 타계함에 따라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가 남긴 판화들은 한국적인 정서가 깔린 가운데 현대적 조형미가 돋보인다. 현대의 미디어아트를 연상케 하는 1972년작 ‘빛의 향연’ 연작, 우리 전통부채 모양에 소용돌이치는 듯한 푸른색 선을 펼쳐 놓은 1970~1973년작 ‘현상’, 추상적 무늬들이 이어지는 ‘회상’(1970~1973), ‘계절의 인상’ 연작(1971년), 고대 문양을 떠올리게 하는 ‘고담’ ‘새벽’ 등 다채로운 동판화들을 만날 수 있다.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는 “전시작은 대부분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유족들 소장품으로,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있어서 우향의 판화 세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운보의 작품을 보면 애틋한 부부애가 느껴진다. ‘청록산수’를 그렸던 운보는 우향이 떠나자 ‘바보산수’를 그렸다. 특히 석류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쌍이 노니는 모습을 그린 1969년작 ‘석류와 다람쥐’는 운보가 우향에게 선물했던 그림이다. 유족이 소장해오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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