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종로학원의 추억

입력 2020-11-23 17:50   수정 2020-11-24 00:17

“이 횡단보도 하나 건너는 데 8년이 걸렸습니다.” 한국경제신문 공채 시험에 합격한 수습기자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는 신문사 맞은편의 종로학원에서 1년, 대학 4년, 군대 3년을 보낸 기간과 두 건물 사이의 거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우스개였다.

종로학원의 원래 출발지는 종로구 인사동이다. 1965년 4월 YMCA회관 건너편에서 시작했으니 55년 역사의 최고(最古) 대입 재수종합학원이다. 1979년 강북 과밀화 해소 정책에 따라 중림동으로 이전해 40년간 명문 학원으로 이름을 떨쳤다. 2018년부터는 신촌으로 옮겨 12개 분원을 운영하고 있다.

설립자인 정경진 씨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후 경기고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우수한 학생도 입시에 실패할 수 있으니 이들을 모아 가르쳐 보자”며 종로학원을 열었다. 대입 참고서 《수학Ⅰ의 완성》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수학의 정석》을 펴낸 홍성대 씨 등 유명 강사진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전국 최고의 입시학원으로 키웠다.

중림동으로 옮긴 뒤로는 매년 학원생 2100명 중 1000명 이상의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연세대(500여 명)와 고려대(400여 명) 입학생도 거의 1000명에 육박했다. 본고사 마지막 해인 1996년에는 2100명 중 1187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종로학원 수강생은 ‘종로대학생’ ‘예비 서울대생’으로 불렸다. 종로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평균 10 대 1의 경쟁률을 넘어야 했고, 커트라인 역시 주요 대학 합격점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강사진도 화려했다. 수학의 이창무 권경수 씨를 비롯해 영어의 이한목 백기선 임성찬 권혜영 임경호 씨, 사회탐구의 강양구 씨, 과학탐구의 권승구 강양춘 최점호 씨 등이 종로학원의 ‘1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거나 지금껏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종로학원 장학생은 5000명이 넘는다.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정경진 설립자는 1969년 용문장학회를 세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했다. 2005년 장남인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커머셜 부회장에게 지분을 넘기고, 2014년 교육 전문업체 하늘교육에 학원을 매각한 뒤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가 지난 21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5년에 걸친 그의 교육보국(敎育報國) 일념이 10만여 명에 이르는 ‘종로대학생’과 그 후예들의 꿈으로 이어져 더 큰 결실을 맺길 기원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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