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world View] 한은법 개정 '길들이기' vs '밥그릇 지키기' 안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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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1-24 17:41   수정 2020-11-25 00:45

[한상춘의 world View] 한은법 개정 '길들이기' vs '밥그릇 지키기' 안되려면

“한국은행법 1조에는 고용 창출 목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아니다. 한은법 1조에는 고용 안정 목표가 필요없다.” 최근 들어 한은법 개정 문제를 놓고 더불어민주당의 한 국회의원과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간에 벌어진 설전의 요지다.

일단 첫 어감부터 안 좋다. 보다 발전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보고 좋은 대안을 찾기보다 ‘길들이기’와 ‘지키기’ 간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 논쟁은 화폐거래 단위를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처럼 시간만 끌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아니면 말고 다음에 또 하지” 식으로 넘어가고, 한은은 “이번에도 지켰다”는 안도의 한숨을 쉴 것으로 예상된다.

특정 기관법의 첫 조항은 해당 기관의 설립 목적을 담는다. 한은법 1조도 한은은 물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모든 법(목적)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이 흐트러지면 실질적으로 법을 위반하더라도 어떤 책임이 따르지 않고 오히려 법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경제적 렌트(rent)가 발생해 현실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해당 기관은 현실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설립 당시엔 인플레가 최대 골칫거리
대부분 중앙은행이 설립될 당시 인플레이션이 최대 골칫거리였다.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많은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부(富)의 재분배를 초래해 해당국 국민의 대다수가 속한 중하위 계층일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발권력을 갖고 최종 대부자 역할을 맡은 중앙은행법에 물가 안정 목표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가 안정 목표도 1990년대 후반 이전까지는 물가를 끌어내리는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중앙은행 역할은 1970년대까지 비교적 잘 지켜졌다. 실물과 금융 간 연계성 문제를 놓고 격리됐다고 본 전통적인 통화론자들은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MV=PT, M: 통화 공급량, V: 통화 유통속도, P: 물가, T: 거래량 혹은 국민소득)에 따라 돈의 공급을 줄이고, 연계됐다고 본 케인지언들은 통화정책 전달 경로(기준금리 변경→총수요 변화→실물경기 조정)에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면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중앙은행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가 1979년 제2차 오일 파동 이후 들이닥친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다. 국제 유가 급등과 같은 총공급 요인에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오르는 종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맞아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폴 볼커 당시 Fed 의장은 과감하게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했다는 차원에서 높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나, 당시 감세를 통해 금리 인상에 따른 실물경기 충격을 흡수한 레이거노믹스(공급 중시 경제학)가 추진되지 않았더라면 실물경기와 물가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악화했을 것이라는 정책 실수 차원에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는 과정은 중앙은행에 두 가지 큰 교훈을 던졌다. 하나는 종전과 다른 현실이 닥쳤을 때 물가 안정만을 고집하다간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정책 실수’로, 실물경기 회복 등과 같은 다른 목적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하나는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통화와 재정 간 ‘정책 조화’(목표가 많아지면 수단과 같아야 한다는 틴베르헌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중앙은행 역할에 결정적 변화를 초래한 때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제3차 산업이 주도했던 1990년대 후반이다. 자원의 희소성 법칙에 따라 생산할수록 공급 능력이 떨어지는 제조업과 달리 네트워크를 깔수록 공급 능력이 확대되는 제3차 산업이 한 나라 경제를 주도할 경우 성장률이 높아지더라도 물가는 안정되는 신경제 국면이 도래했다.
‘수확 체증’의 신경제로 중앙銀 역할 변화
중앙은행으로서도 더 이상 좋아질 수 없는 ‘골디락스’ 국면을 맞았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Fed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위상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신의 직장’으로 평가받던 황금기였다.

누구든 굶주렸을 때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음식이 눈앞에 놓이면 먹을 수밖에 없는 유혹에 빠진다.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상한 음식을 먹으면 나중에 큰 고통이 따른다. 신경제 국면에서 Fed와 그린스펀 의장이 실수한 것은 물가 안정만을 고집하다가 날로 심해지는 부동산 등에 끼기 시작한 거품을 방치한 점이다. 자산 거품이 심해지자 당황한 그린스펀 의장이 뒤늦게 2004년부터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으나 1990년대 이후 진전돼온 세계화 과정에서 경제 위상이 부쩍 높아진 중국의 미국 국채 매입으로 시장금리는 거꾸로 떨어지는 ‘그린스펀 수수께끼’ 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자산 거품이 더 심해지면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이어 2009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2004년 그린스펀 Fed 의장의 금리인상 조치는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서 큰 의미가 있다. 중앙은행이 ‘주력산업 교체’ ‘세계화’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물가 안정만을 고집하다간 통화정책의 생명인 선제적 대응이 어렵게 되고, 정책 실기는 나중에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엄청난 후폭풍과 비용을 치른다는 점이다. 통화정책 관할 대상도 더 이상 실물경기만을 고집해선 안 된다는 점을 느끼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뒤늦게 반성한 각국 중앙은행의 변신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봉장에 선 Fed는 2012년부터 전통적인 물가 안정에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1913년 설립 이후 물가 안정만을 고집해온 Fed로서는 100년 만의 대변신이다. 통화정책 관할 대상도 ‘그린스펀 독트린’에서 ‘버냉키 독트린’으로 넓어졌다. 전자는 통화정책은 실물 경기만을 고려해 추진해야 한다는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의 주장이고, 후자는 실물 경기뿐만 아니라 자산 시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벤 버냉키 전 Fed 의장의 주장이다.

2020년대 첫해를 맞아 각국 중앙은행과 통화정책 여건에서도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전환점을 맞고 있다. 뜻하지 않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통화정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27일 끝난 19기 5중 전회에서 42년 만에 수출에서 내수 위주의 ‘쌍순환 전략’을 채택했다. 내년 1월 20일이면 미국 대통령도 도널드 트럼프에서 조 바이든으로 교체된다.
‘코로나 쇼크’ 가장 큰 고용시장 대응 필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가장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곳이 고용 시장이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사람과 사람을 격리하고 이동을 차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K’자형 경기가 심화되면서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영구 실업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상용화된다고 하더라도 영구 실업자를 비롯한 대규모 실업 사태가 쉽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중하위 계층의 대규모 실업자가 세력화해 고소득층과 기득권에 저항할 경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중대한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당선 윤곽이 잡히자마자 ‘통합’과 ‘화합’을 강조한 바이든 당선인은 일자리 창출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부통령으로 근무할 당시에도 경기 대책을 아예 일자리 대책으로 명명해 금융위기 이후 발생한 대규모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력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통화시대 대비할 때
주요국 속속 도입…韓銀도 '디지털 원화' 내년부터 시범 운용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까지 넘보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불허 방침에 따라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던 미국 중앙은행(Fed)이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첫해를 맞아 ‘디지털 달러화’를 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5월 시범운용해 당초 기대 이상으로 잘 정착되고 있는 디지털 위안화가 법정통화와 중국 밖 사용을 검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또 다른 형태의 기축통화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각국의 디지털 통화 도입 경쟁은 현재 인식보다 더 깊은 단계에 와 있다. 중국보다 앞서 스웨덴이 지난 2월부터 ‘e-크로나’를 도입해 성공을 거둠에 따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디지털 유로화 도입 방침을 밝혔다. 디지털 위안화 시범운용 이후 아시아 중심 통화 지위를 중국에 뺏길 것이라는 위기감에 일본도 디지털 엔화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80%가 도입을 전제로 디지털 통화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통화 시대가 전개될 경우 Fed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킹 효과와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디지털 통화 시대에 각국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목표인 ‘물가 안정’만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존 효과 등으로 물가가 크게 올라갈 가능성이 작을 뿐만 아니라 기준금리 변경, 유동성 조절 등과 같은 종전의 통화정책 수단도 무력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른 경제주체도 공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한 중앙은행의 시장 주도 기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즉, 중앙은행과 시장 참여자(시중은행 포함) 간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동반자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위상과 금융시장 효율성 지표인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 약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각국 국민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새로움과 복잡성’에 따른 위험이 증대되고, 화폐 개혁 논의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유사 금융행위와 금융사고가 판치게 된다. 이런 환경에 맞춰 금융 감독이 새로운 방식, 이를테면 옴니버스 방식 등으로 접근하지 못할 경우 각국 국민의 화폐 생활에 일대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도 화폐 개혁 논쟁은 국민의 저항이 큰 ‘리디노미네이션’보다 ‘디지털 원화’를 도입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주무 부서인 한국은행은 내년에 ‘디지털 원화’ 시범운용 계획을 발표한 만큼 중앙은행 목표 수정, 디지털 통화지표 개발, 통화 유통속도와 통화승수 무력화 방지, 통화정책 관할 범위 확대, 통화정책 전달경로 유효성 점검, 경기 예측력 제고 등의 과제를 사전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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