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칙사 대접' 중국 사신맞이

입력 2020-11-26 17:52   수정 2020-11-27 00:13

“상(上·임금)이 경복궁에 있다가 묘시(卯時)에 돈의문을 거쳐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조칙(詔勅·중국 황제가 내리는 글)을 맞이했다. 중국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놓으니 길복(吉服)을 갖춰 입은 상이 대청 앞의 행각(行閣)에 올라 사배례(四拜禮·네 번 절하는 의식)를 거행했다.”(《조선왕조실록》인종 1년 4월 28일)

조선의 역대 왕들은 중국 사신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특히 황제의 칙서를 지참한 칙사는 대우가 남달랐다. 융숭한 접대를 일컬어 ‘칙사 대접’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다. 사신들은 수많은 비단, 약재, 보석 등을 뜯어갔을 뿐 아니라 공식 임무를 마친 뒤엔 서울을 느긋하게 관광하는 ‘유관(遊觀)’을 즐겼다.

현대인의 시선에선 ‘굴욕감’마저 들 정도로 중국 사신 앞에서 온 나라가 절절맬 때가 많았다. 지금의 독립문 자리인 모화관까지 왕이 직접 거동해 사신을 맞이하곤 했다. 사신을 궁궐로 ‘모실’ 때에도 왕이 자신보다 앞서갈 것을 권하거나 나란히 궁으로 들어왔다.

사신 앞에선 왕 행세도 제대로 못 했다. 왕은 남면(南面·남쪽을 바라봄)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선 맞절을 했다. 조선의 최고 지도자가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하면 중국 사신뿐이었다.

조선이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事大主義)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大明會通)》 기록을 고치려다 명나라에 끌려다녔다.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 눈치를 봤다.

방한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조선시대 사신 접대가 연상될 정도로 떠들썩하다. 중국 내 서열이 20위권에 불과한 인사가 국가원수급인 양 문재인 대통령과 박병석 국회의장 등 권부 핵심을 돌아가며 만났고, 여당 대표는 그에게 친전을 보냈다. 여권 수뇌부는 그를 보기 위해 줄을 섰다. 반면 왕 장관은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회담에 25분가량 지각하며 거만한 중국 사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환대를 넘어 끌려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과공비례(過恭非禮)일 뿐 아니라 미묘한 시기에 자칫 중국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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