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덕후들이 말하는 문구의 힘, 기록의 힘!

입력 2020-11-26 17:38   수정 2020-11-27 02:06

연필 2500자루 모은 함은혜 마케터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구글코리아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함은혜 부장은 유명한 ‘연필 덕후’다. 2년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존 스타인벡이 즐겨 썼던 연필, ‘에버하르트 파버’의 블랙윙을 사면서 수집을 시작했다. 그 후로 ‘파버카스텔’ ‘비아르쿠’ ‘브라이즈델’ 등의 빈티지 브랜드를 기회가 될 때마다 사모았다. 그렇게 수집한 명품 연필만 2500자루. 연필 ‘재고’ 관리를 위한 장부까지 갖고 있다.

함 부장은 “보통 연필의 전성기였던 1950~1980년대 생산된 제품이 많다”며 “그중 제일 오래된 건 200년도 넘은 A.W.파버의 네모난 흑심을 넣은 연필”이라고 소개했다. A.W.파버는 파버카스텔의 전신 브랜드다. 그는 A.W.파버 연필을 시대별로 여러 자루 갖고 있다. 미국 이베이에서 경매로 샀는데 가격은 자루당 40~60달러.

존 스타인벡이 즐겨 썼던 ‘브라이즈델’의 칼큘레이터, ‘에버하르트 파버’의 블랙윙 602와 몽골480은 자루당 70~120달러씩 주고 샀다. 함 부장은 “연필 덕후들이 좋아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블랙윙 602인데 이 연필은 1990년대 에버하르트 파버가 도산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가 이후 팔로미노라는 회사가 판권을 사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연필을 모으는 이유는 단순하다. 쓰기 위해서다. 그래서 필기감이 좋은 연필들을 중심으로 수집했다. 함 부장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특유의 향도 나고 필감도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가장 비싸게 주고 장만한 건 스페인 브랜드 ‘엘카스코’의 연필깎이다. 그는 국내에서 70만원대에 판매되는 이 제품을 스페인에서 공수해 왔다. 에펠탑의 라인처럼 연필이 깎인다.

그에게 연필은 명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시각과 후각, 촉각, 청각을 자극하며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함 부장은 연필 모양을 그려 마스킹 테이프도 제작했다. 명함처럼 나눠주기 위해서다. 그는 “누굴 만날 때 연필 모양의 마스킹 테이프를 건네면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설명할 수 있어서 좋다”며 “계속 ‘덕질’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아날로그키퍼' 문경연 대표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선택하는 게 문구입니다. 누구나 그 추억과 경험을 갖고 있죠.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경험이자 개성이 반영된 선택이기 때문에 사실 누구나 잠재적 ‘문구덕후’입니다.”

3년차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키퍼’를 운영하고 있는 문경연 대표는 ‘문구덕후’다. “모든 문구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신제품 하나를 내놓는 데 6개월 넘게 걸린다. 작년에 선보인 우주여행 콘셉트의 신제품은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기억은 우주여행을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카운트다운’과 ‘랑데부’ 두 가지 콘셉트로 기승전결의 스토리 라인을 짰다.

명확한 콘셉트를 정한 뒤 제품군을 구성한다. 그다음 단계는 색을 넣는 것. 실제 종이를 잘라 만든 샘플과 탈락한 아이디어까지 모두 한데 묶어 아카이빙 북을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검증 작업을 수없이 거친다. “반드시 이 디자인에 이 종이, 이 색이어야만 하는가”를 되묻는다.

그는 “문구는 나 자신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도구이자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문구사업은 스스로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을 응원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날로그키퍼가 강조하는 건 ‘기록’이다. 문 대표는 “‘문구를 사세요’가 아니라 ‘기록하세요’라는 마음으로 문구를 세상에 내놓는다”고 말했다.

아날로그키퍼의 베스트셀러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핸디 다이어리다. 이 제품은 지난 9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한 달 동안 택배에 같이 넣어주는 손글씨 영수증을 3000건이나 썼다. 모두 문 대표가 직접 적는다. 엄지손가락이 부풀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였지만 그는 “아무리 주문이 늘어도 손편지 영수증을 꼭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구를 통해 온기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 대표에게 인생의 목표를 묻자 “죽을 때까지 문구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더 많이 기록하고 나중에 꺼내 보면서 찬란했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을 오롯이 돌아보게 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문구' 김규림 작가
김규림 작가는 배민문방구 마케터 출신 작가다. 2015년 배민문방구 면접 당시 김 작가는 “가방 속 문구를 보여줄 수 있냐”는 질문에 손때 묻은 가죽 커버 속 노트와 그림일기, 아이디어 메모와 즐겨 쓰는 만년필을 자신 있게 꺼내들었다. 결과는 합격. 지난해엔 배민이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김 작가도 1년간 파견근무를 했다. 하지만 조금 더 내공을 쌓고 싶어 퇴사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용돈의 8할을 문구 사는 데 썼고 남들과 똑같은 게 싫어 필통을 만들었다. 예쁜 노트를 사면 써보고 싶은 마음에 일기와 아이디어를 적는 걸 즐겼다.

김 작가는 일본 여행을 하면서 쓴 그림일기를 손글씨 그대로 묶어 펴낸 《도쿄규림일기》를 시작으로 《뉴욕규림일기》 《아무튼, 문구》 《문구인 일지》 등의 책을 출간했다. 스스로를 “문구를 좋아하고, 만들어 쓰고, 기록하는 등 문구를 즐기는 ‘문구인(文具人)’”이라고 소개했다.

김 작가가 기록을 습관화하면서 배운 건 “모든 고민엔 답이 있다”는 것이다. 김 작가는 “현재 고민의 답을 과거의 내가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 걸 손에 잡히도록 만드는 게 기록의 힘”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데 적어두지 않으면 기억이 나지 않아 휘발된다”는 설명이다. 그걸 붙잡아두고 다시 곱씹어보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그가 매일 기록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가 노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노트마다 이름을 붙인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책과는 상관없는 생각들’, ‘나를 두드린 문장들’, ‘김규림의 알고리즘을 찾아서’ 등이다.

김 작가의 꿈은 “규림문방구를 여는 것”이다. 단순히 ‘문구를 파는 곳’이 아닌, ‘김규림의 취향대로 꾸미고 큐레이션한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마치 오마카세처럼, 이 노트에 잘 어울리는 펜까지 추천하는 방식으로 색다른 공간을 꾸미고 싶어요. 그러려면 문구를 더 깊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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