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진정한 주역, 의병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11-29 08:49   수정 2020-11-29 08:50


의병(義兵), 의승(義僧), 의기(義妓), 의곡(義穀)

이러한 선조들을 생각하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돌아온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자랑스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비상시국이었고,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부재 현상을 알리는 안타까운 증거들이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적
1592년 4월 13일 17시경 ‘임진왜란’ 또는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륙 후 2번의 전투를 마치고 북상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을 격파한 후에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조선의 군대는 제 역할을 못 했고, 임금이 황급히 탈출한 서울은 아비규환이 됐다. 동요한 백성들은 공포에 떠는 존망의 기로 속에서 이순신의 옥포 해전 승리 소식을 들었다. 이와 함께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재산을 털고 노비들을 포함해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들었다. 역사에서 의병의 존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는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1000여 명의 군사로서 낙동강 전투 등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했으며, 남원 지역의 안영(安瑛)· 나주의 김천일(金天鎰) 등의 의병과 합동으로 호남을 방어했다.

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일어나 승군 500명과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관군의 불참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이다가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함경도 북쪽에서는 정문부가 적군에 투항한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소위 북관대첩을 이뤘다. 그 밖에도 젊은 김덕룡 형제를 비롯해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 손인갑, 권응수 등이 있었다. 1차 진주성 대첩에 참여한 최경회, 심대승, 임계성 등과 황해도의 장응기 등이 있었다. 의승들은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이 이끈 1000여 명을 비롯해 강원도에서 유정(사명당), 호남에서 처영, 충청도에서 영규 등이 각각 의승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1593년 정월에는 의병이 무려 2만 2600여 명으로 늘어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할 정도였다. 해체되기 전인 임진년에는 더 많았다. 그 밖에 ‘논개’, ‘계월향’ 같은 의기도 있었고, 많은 백성이 비전투원으로 참여하면서 의곡 등을 제공했다(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궁금하다. 이들은 왜 생명과 재산을 포기하면서 의병으로 궐기했을까?

'충(忠)' 때문이었을까? 또는 '의(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족들의 안전 때문이었을까?
의병장들은 양반 신분이고, 퇴직 관료이며, 재야의 성리학자들이었다. 그래서 ‘근왕 정신’ 즉 ‘충'과 성리학의 명분인 ‘의’와 ‘신(信)’을 지켜야 했고,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명과 생활, 가족들의 안위까지 걸며 거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실제 아들 둘과 함께 죽은 고경명처럼 의병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훗날 조선이 진짜로 망할 때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나선 이들처럼. 의병의 주력은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농민과 노비 등 불만이 많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의병장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고, 가족을 지키려는 생물학적인 본능으로 의병에 참여했다. 승려들은 종교인으로서의 심성과 책무감으로 참여했지만, 성리학의 나라에서 천대받았던 불교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의주까지 몽천한 선조는 다급해지자 73세의 서산대사 휴정을 불러들여 협조를 구했다. 이후 의승들은 조직적으로 전투는 물론, 식량 조달 등의 방식으로 참여했다(조영록, ??사명당 평전??).
의병들의 전쟁에서의 역할
의병들은 어떤 역할들을 수행했을까?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승리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항전의 의지를 되찾는 전기를 만들었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향토 방위에 주력했으나, 곧 다른 지역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전투행위를 펼쳤다. 나주의 김천일은 수백의 의병을 지휘하여 선조의 행재소로 북상하다가 강화도 작전을 펼쳤고, 한강 작전으로 승리했다. 광주에서 거병한 고경명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승전을 이끌어냈다. 관군과 명나라군의 평양성 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의승군은 이어 벌어진 서울 근교 한강가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인해 함경도는 보존됐고, 가토오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두만강을 못 넘어 전선의 확대가 저지됐고,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인해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들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서 적에게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그러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면서 전투에 몰두했고, 전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까?

그들과 관군은 군대체계, 운영방식, 특히 향리에서 벌이는 작전방식 등에서 차이가 컸으며, 상호불신과 전공의 다툼 때문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의병의 전과가 관군을 능가했다. 따라서 패전과 무능, 직무유기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들과 직업군인들에게 의병의 존재는 매우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병은 점차 해체되고, 관군에 흡수됐다.

전투 중에 전사한 조헌, 김시민, 고경명 등의 의병장들은 명예를 얻고, 후손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았다. 반면에 관군과 다투거나 정부의 의견을 경시했던 의병장들은 비참했다. 형과 함께 거병하여 뛰어난 전과를 세운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과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전쟁 중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 거병한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2000여 명의 병력을 운영했다. 낙동강 수로망의 거점인 의령의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이 호남에 진출하는 통로를 막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군과 갈등을 벌였고, 결국 강화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595년 가을에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선조는 그의 재등용을 상주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는 고향에서 망우당을 짓고 도인처럼 빈궁하게 살다가 죽었다(이장희, ??곽재우 연구??). 그 밖에도 많은 이들이 전쟁 중에도 고초를 겪었고, 전쟁 후에는 숙청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농민들도 전보다 더 억압당했다. 전쟁의 과정을 목도하고, 참여를 통해 세계관의 변화와 실력을 자각한 그들을 조선 사회가 용인할 리는 없었다. 조선은 더 심각한 붕당 정치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또다시 병자호란을 당했다.

나는 두렵다.
내부의 갈등과 경제의 어려움 등은 결국 국내문제이므로 인(仁)·예(禮)·지(智)가 필요할 뿐이지만, 냉정한 국제관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만약 머지않아 ‘의’와 ‘의병’이 필요로 되는 상황이 촉발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임질 이유가 없는 젊은 세대들, 다가올 미래의 주역들인 어린 세대들의 생각과 행동이 궁금하다.

역사학자로서 그분들께 솔직하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의병 활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전쟁이 끝난 후의 조선을 저세상에서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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