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집 마당에서 세계적 소재 기업 일군 '원조 벤처인'

입력 2020-12-01 17:23   수정 2020-12-02 00:46


서울 광화문 옛 조선총독부 철거 공사가 시작된 1995년 8월 7일. 건물의 상징이었던 첨탑을 제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던 현장 관계자들 사이에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80)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높이 8m, 무게가 30t에 달하는 첨탑을 절단하기 위해 사용된 줄톱에 일진다이아몬드가 첨단 기술로 개발한 ‘공업용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국내 토종기술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광경은 부품·소재 전문기업 일진을 일군 허 회장의 여정과도 맞닿은 상징적 장면이기도 하다. 허 회장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기술 국산화야말로 진정한 독립이자 대한민국 엔지니어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술 독립이 엔지니어의 사명”
1978년 허 회장은 전자산업의 핵심 소재인 일렉포일 개발에 나선다. 일렉포일은 전기분해로 만든 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두께의 얇은 동박이다. 전자제품 인쇄회로기판(PCB)에서 반도체와 전자부품 사이의 전기 신호를 오가게 한다. 인체의 혈관과 같은 핵심 소재다. 그는 제품 개발을 위해 회사 연구진과 함께 일본 전역에 있는 일렉포일 공장을 방문했다.

일렉포일은 미국이 먼저 개발했지만, 일본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한국은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소재였다. 일본은 한국에 품질이 낮은 C급 이하 제품만 판매할 정도로 기술보안에 철저했다. 현지 일렉포일 공장들 역시 외부인이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창문까지 없앨 정도로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방문한 허 회장 일행을 반길 리 없었다. 허 회장은 근처 여관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공장을 살폈다.

문전박대 속에서도 틈틈이 일본의 여러 공장을 다니며 끈질기게 정보를 수집하던 허 회장은 1984년 서울 문래동 공장에서 본격적인 일렉포일 개발에 들어갔다. 연구실 책상엔 ‘극일(克日)’이라는 구호를 써붙였다. 수년간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허 회장은 1988년 마침내 국내 최초로 시판용 제품을 만들어냈다. 연구개발에 뛰어든 지 10년 만의 성과였다. 일렉포일을 생산하는 일진머티리얼즈는 세계 전기자동차 배터리용 일렉포일 시장에서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對)일 무역적자 해소에도 일조한 일렉포일은 1999년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20세기 대한민국 100대 기술’에 오를 만큼 국내 산업사에서 의미있는 개발로 꼽힌다. 허 회장은 “전자산업에서 반도체를 쌀이라고 부르는데, 일렉포일은 전자산업의 밭과 같다”며 “이걸 국산화하지 못했다면 한국 전자산업은 결코 일본을 꺾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 앞마당서 창업에 나선 ‘원조 벤처인’
허 회장이 창업에 나선 건 1968년, 그가 갓 28세가 되던 해다. 원래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를 꿈꾸던 공학도였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재학시절 미국 유학까지 준비했던 그의 인생 항로가 바뀐 건 학생군사교육단(ROTC) 1기에 지원하면서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그가 배치받은 곳은 총포, 탄약, 차량 등을 개발하는 병기감실이었다. 허 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전국의 산업현장을 시찰하면서 한국의 공업 수준이 형편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부품 소재 산업을 국산화해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게 급선무라는 걸 체감한 그는 유학은 사치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 졸업 후 일본인이 공장장으로 있던 한 주물공장에 취업했다. 배울 게 많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당시 인기 있던 외국계 기업이 월급 1만원을 줄 때 절반인 5000원을 받는 조건도 감수했다. 창업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입사 1년 만에 몸담고 있던 회사가 도산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노량진의 집 마당에 주물 설비 하나를 들여놨다. 일진그룹 모태가 된 일진금속공업사(현 일진전기)의 출발이다. 김희수 전 일진전기 대표는 “허 회장은 차고에서 창업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구글의 래리 페이지를 연상케 하는 한국의 1세대 벤처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경쟁자가 손 못 대는 기술만 개발해
일진그룹이 독자 개발한 제품은 일렉포일 외에도 공업용 다이아몬드, 동복강선(철심이 박힌 구리전선), 심리스 강관(이음새가 없는 강관), 수소 연료탱크 등 다양하다. 허 회장이 이런 제품을 개발할 때 세운 나름의 원칙이 있다. 누구나 제조할 수 있는 평범한 기술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다. 공업용 다이아몬드 개발이 그랬다.

일진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1년여의 산학 협력을 통해 1986년 4월 섭씨 1450도에서 5만 기압으로 흑연을 눌러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했다. 당시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영국의 드비어스가 수십 년간 과점하던 난공불락의 시장이었다. 일진은 이 과점 체제를 깨고 단숨에 세계 세 번째 다이아몬드 생산업체로 올라섰다.

국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는 기술만 개발한다는 것도 그의 기술철학 가운데 하나다. 주로 전량 수입하던 제품을 국산화하는 데 주력해온 이유다. 일진전기에서 1976년 개발한 동복강선은 농촌 근대화를 앞당긴 공신으로 꼽힌다. 동복강선 덕에 전국 구석구석에 호롱불 대신 전깃불이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복강선은 전기의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철선 표면을 구리로 코팅한 전선이다. 당시 국내 대기업들도 개발에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제품이다.
끝을 볼 때까지 승부 거는 ‘뚝심 경영’
한국의 작은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일진이 국내외 산업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사건이 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 개발 후 GE와 벌인 수년간의 특허권 분쟁 소송에서 승리한 것이다. 600여 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GE의 막강한 법무팀을 상대로 한 법정 다툼은 애초 승산이 희박한 게임이었다.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그룹 내에서 허 회장이 유일했다. 소송은 일진의 승리로 끝났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이긴 허 회장이 ‘뚝심의 경영자’로 각인된 계기다.

일단 기술 개발에 들어간 분야는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질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수소 연료탱크는 변변한 시장 수요조차 없던 시절부터 개발에만 10년을 매달린 제품이다. 1988년 첫 양산을 시작한 일렉포일 역시 불량이 완전히 해소된 건 1997년에 들어서였다. 허 회장은 그때까지 수천 번 이상의 실험과 투자를 거듭했다. 개발 기간이 오래 걸려 계열사 대표가 포기하고 내보낸 기술자를 다시 불러 개발을 끝낸 적도 있다.

허 회장은 2017년 ‘부진즉퇴(不進卽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중국의 부상 등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해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절박감에서다. 그는 “매일 나아가자는 일진(日進)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자는 각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일본이 소재·부품 수출을 규제한 것도 그에게 남다른 자극으로 다가왔던 순간이다. 허 회장은 “한국 제조업의 경쟁자는 이제 미국 독일 일본 중국 정도”라며 “일진처럼 경쟁력을 갖춘 부품 소재 기업이 두세 개 더 나와 산업의 뿌리가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1963년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1968년 일진금속공업사(현 일진전기) 설립
△1987년 일진소재산업(현 일진머티리얼즈) 설립
△1988년 일진다이아몬드 설립
△1990년 서울대 신소재공동연구소 기증
△2004년 일진디스플레이 설립
△2008년 대한민국기술대상 금탑산업훈장


이정선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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