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에는 육지의 나라만 있지는 않았다. ‘해중지(海中地)’, 즉 물의 나라, 섬의 나라도 있다. 사료에는 동해의 우산국, 남해의 탐라국과 대마국, 서해의 대석삭국(강화도)과 소석삭국(교동도)만 나온다. 하지만 랴오둥반도의 동남쪽 아래인 장산군도, 경기만 바깥의 백령도를 비롯한 연평군도, 덕적군도, 또 흑산군도에도 소국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해가 처음 떠오르는 동해는 남북 길이가 1700㎞, 동서 최대 너비는 1000여㎞, 면적은 107만㎢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타타르 해협’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하나뿐인 섬이 72.6㎢ 면적의 울릉도다. 1032년 ‘우산국주’가 아니라 ‘우릉성주’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우산국(于山國)이었지만, 이후에는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릉도(芋陵島 또는 于陵島, 羽陵島), 우릉성(羽陵城), 독섬 등으로 불렸다. 울릉도에서 88㎞ 떨어진 독도는 ‘새끼섬’이다. 생산활동의 중요한 영역이고 피항하거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 절대적인 생활공동체다.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도 ‘울릉(鬱陵)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라고 하나의 역사적 영토로 규정했다.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울진에서 159㎞, 강릉에서 178㎞, 삼척에서 161㎞, 포항에서 217㎞다. 《삼국유사》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2일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가 있는데, 주변이 2만6730보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 여인국은 어디일까? 쿠릴섬(사할린섬), 니가타 앞 사도(佐島)섬, 그리고 울릉도(이병도 설, 이케우치 히로 설)라는 설들이 있다. 물론 확정된 것은 없지만, 그 무렵 동해 원양까지 어업을 한 사실들은 인정한 것이다.
신라는 울릉도·독도와 주변 해역을 영토로 삼은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김이사부는 512년 하슬라주 군주로 옮긴 후 전쟁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파도가 잔잔해지는 음력 6월에 수군을 동원해 동해를 건넜다. 그는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쉽게 항복시킬 수 있는 꾀를 냈다. 즉 나무로 사자(목우사자)를 많이 만들어 함선에 싣고 접근한 뒤,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무시무시한 광경을 처음 본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곧 항복했다. 이 나무사자들이 불교의 힘을 상징한 것인지, 독특한 전함을 의미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신라는 왜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전함들을 수리한 기록도 있으며(467년), 병선을 병부에서 직접 관리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목우사자’는 신형 전함일 가능성도 있다.
울릉도가 역사상 중요한 위치로 부상한 시기는 5세기다.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고구려로서는 중간 거점인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 물표로 활용하면 안정성이 높았을 것이다. 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이 강해져 북진정책을 취했고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