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수 잘못 찾는 대일 외교, 위태롭기까지 하다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12-10 09:27   수정 2020-12-10 10:16


지난해 일본이 불화수소 등 반도체 생산 핵심 소재에 대한 전격적인 수출규제 조치 이후 급랭했던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양국 간 물밑접촉이 꾸준히 이어지는 분위기입니다. 한·일 양국 모두 역대 최악 상황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죽창가'와 '보이콧 재팬'을 앞에 내세웠던 한국 정부의 태도에도 적잖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은 화상으로 진행된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꼭 찍어 "특히 일본의 스가 총리님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최근에는 차기 주일대사로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동양사학)를 취득한 '일본통'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내정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행보로는 지난달 8일 이후 릴레이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일본을 찾아 스가 총리 등을 예방한 데 이어, 한일의원연맹 소속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들도 한일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큰 곤란을 겪는 가운데 외교 관계자가 아닌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양국 관계개선을 위해 외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 원장이 일본 수뇌부에 문 대통령의 의중 등을 직접 전하는 '미션'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 박 원장은 "스가 총리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와 한·일 관계개선 의사를 전달했다"고 밝혔고, 스가 총리를 예방한 자리에서 박 원장이 새로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언급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국정원장이 특사 역할을 맡으며 방일했다는 파격 못지않게, 박 국정원장과 한·일 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대일 교섭창구로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창일 주일대사 내정자를 발탁한 배경에도 강 내정자와 니카이 간사장 간 친분을 고려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일의원연맹이야 일본 측 회장인 카운터파트 니카이 간사장을 통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박 원장의 경우는 입장이 다릅니다. 물론 박 원장과 니카이 간사장이 막역한 사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박 원장은 2000년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당시 운수성 장관이던 니카이와 한일 관광교류, 항공 증편 문제 등을 논의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이후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박 원장이 대북 송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 니카이가 면회하고 내복을 보낼 정도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8월에도 박 원장이 국회의장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니카이 간사장과 만나 한일관계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친분 여부를 떠나 박 원장이 외교부~주일 한국대사관~일본 외무성·총리관저의 공식 접촉 루트를 건너뛰고 니카이 간사장을 통해 대일 접촉을 진행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 측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식 대일 접촉라인의 붕괴를 가속할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니카이 간사장은 일본 자민당의 ‘실세’이자 자민당 내 중견 계파인 니카이파(소속 의원 47명가량) 수장으로 스가 내각 출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힙니다. 스가 총리의 외교 자문역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가 총리와 니카이 간사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미 총리가 된 스가로선 공식라인을 건너뛰고 한국이 니카이를 통해 접촉을 해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계파정치는 언제 어느 때 '친구'가 '적'으로 돌아설지 모릅니다. 스가 총리와 니카이 간사장이 지금은 우호 관계지만 언제 관계가 껄끄러워질지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니카이만 찾고, 니카이 외에는 일본과 연락할 줄이 없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공식적인 대일 접촉 루트가 아닌 사적인 길을 찾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 대 국가의 일은 근본적으로 '공적'인 일입니다. 자꾸 사적인 관계만 알아보는 것은 좋은 방법도, 옳은 길도 아닙니다. 외교는 상대방이 있는 것인데 상대방 입장에서도 물밑의 길, 그것도 한가지 길로만 연락이 오는 것은 난감하고 불편한 일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관계개선에 물밑접촉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공식 접촉경로를 방치하다시피 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점을 한국 정책 당국자들이 명심했으면 합니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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