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품은 대리석·LED·리넨…감각과 생각을 열다

입력 2020-12-13 17:55   수정 2020-12-14 00:33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설치된 약 3m의 사각기둥 네 면에 글자들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권력 남용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PURSUING PLEASURE FOR THE SAKE OF PLEASURE WILL RUIN YOU(쾌락을 위한 쾌락은 사람을 망친다)’ ‘MONEY CREATES TASTE(돈이 취향을 만든다)’ ‘A SENSE OF TIMING IS THE MARK OF GENIUS(타이밍 감각은 천재성의 표식이다’….

글자들은 빨강 파랑 초록 분홍 등 다양한 색으로 바뀌면서 빠르게, 느리게 아래위로 흘러간다. 기둥이 회전하면서 글자들이 같이 돌기도 하고, 기둥 위쪽 턴테이블의 회전과 함께 시각적 리듬을 그려내기도 한다. 7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무려 240개의 경구가 영문과 국문의 두 버전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K3(제3전시장)에 설치된 미국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70)의 LED 신작 ‘경구들(TRUISM)’이다. ‘경구들’은 홀저가 1970년대부터 꾸준히 모아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해온 일련의 격언 문구로, 그는 스스로 “동서양 철학에 대한 제니 홀저 버전의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라고 했다. 엄격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공격적인가 하면 때로는 모순적이고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생각을 멈추고 가다듬는 계기로 작용한다.

홀저는 지난 40여 년간 언어를 주요 재료로 삼아 작업해온 개념주의 미술가. 정치·사회적 이슈를 담은 LED 작업으로 유명하다. 진보적인 성향의 반(反)트럼프 인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양한 원전에서 엄선한 문구를 회화, 설치, 조각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하면서 당대의 사회 현안을 환기시켜온 그가 국제갤러리 K2, K3에서 개인전 ‘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을 열고 있다. 2004년과 2011년에 이은 세 번째 국제갤러리 전시다.

전시 제목은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및 과천관에서 신작을 선보인 지 1년 만의 한국 전시인데, 코로나19 때문에 작가는 오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는 LED 작품 4점과 대리석 벤치에 경구를 새긴 작품 9점,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미국 정부 및 군사 문서를 추상화로 탈바꿈시킨 ‘검열회화’ 19점, 최신 수채화 연작 36점 등 총 68점을 가져왔다.

대리석 작품은 대리석으로 만든 벤치에 경구를 새긴 것으로, 단독으로 또는 LED 및 회화 작품 등과 함께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대리석 벤치에는 ‘사람은 꿈속에서 솔직하다’ ‘최대한 자주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라’ ‘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등의 경구가 국문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K2 전시장에 걸린 ‘검열회화’ 연작은 이미 상당히 검열된 상태로 기밀 해제된 문서가 작가의 손을 거쳐 거대한 추상화로 변신한 작품들이다. 홀저는 리넨 위에 유화물감으로 문서들을 재현하면서 검열의 흔적을 다채로운 금박, 은박으로 덮어 정보의 은폐와 공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최신 수채화 연작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가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에 관한 미국 연방수사국(FBI) 수사 결과를 담은 ‘뮬러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그림 36점이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추문’ ‘궁극의 죄악’ 등 제목만 봐서는 속뜻을 알기 어렵다.

홀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보내온 영상 메시지에서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게 너무 힘들다”며 “팬데믹에 대처한 한국의 방역체계를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존경한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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