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죽을 때까지 공격"…이 '피의 전투'에 승자는 없었다

입력 2020-12-17 17:44   수정 2020-12-18 03:36


“이것은 영웅적 행위가 아니오. 치욕이오. 저들은 내일 우리를, 피를 다 쏟고 생각을 빼앗기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피로에 짓눌려 지쳐 빠진 이 피조물들을 어떤 종류의 국민으로 만들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던 프랑스 중사 마르크 보아송이 전쟁터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총알받이’ 신세가 된 군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아송의 편지는 영국 역사학자 앨리스터 혼의 《베르됭 전투》에 실려 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도시 베르됭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를 분석하며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주요 참전국의 외교적 역학관계와 힘의 균형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자료는 물론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생존한 참전 군인들의 증언까지 두루 반영했다.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이자 두 번 다시 벌어져선 안 될 ‘소모전의 전형’으로 꼽힌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가 각각 30여 만 명에 달했다. 시작은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1915년 말 프랑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하고, 첫 전투지로 베르됭을 선택한 것이었다. 베르됭은 독일과 프랑스가 수차례 치열하게 맞붙은 곳이었다.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란 이름으로 베르됭을 공격했다. 팔켄하인은 ‘말려 죽이기’ 전략을 썼다. 초반에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완전히 소모시킨 뒤 서부전선을 돌파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은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 전략으로 맞섰다.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다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단순 계산했다. 독일군이 병력을 빼내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됐지만, 70만여 명이 이 전투에서 죽거나 다쳤다.

저자는 “베르됭 전투는 결말 없는 전쟁의 결말 없는 전투이자 불필요한 전쟁의 불필요한 전투, 승자 없는 전쟁의 승자 없는 전투”라고 비판한다. 참호 속에서 쥐와 벼룩에 시달렸던 병사들, 시신 더미로 막혀버린 포탄 구덩이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베르됭 전투가 남긴 교훈은 “앞으로 어떤 전쟁도 이 전쟁처럼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똑같이 강력한 현대의 두 산업국가가 벌이는 총력전은 인명을 앗아간다”고 지적한다. 강대국 간 전쟁의 결과는 공멸일 뿐이란 증거가 베르됭 전투였다.

독일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베르됭은 ‘영광의 격전지’였다.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명예롭게 싸웠던 장소로 여겨졌다. 저자는 “전투 발발 후 석 달이 지나면서 어찌된 일인지 전투가 인간의 지휘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며 “영광의 상징에 사로잡혀 두 나라 모두 전술적으로 후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베르됭 전투는 1차대전의 흐름을 바꿨다. 독일 패망의 원인이 됐고, 프랑스와 영국 등 연합국에 힘을 보탰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이 강대국 대열에 들어선 간접적 계기도 됐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 낭비와 더없는 어리석음에 소름이 끼쳤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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