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펭귄'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

입력 2020-12-21 09:00  


새로운 분야에 최초로 진출한 기업은 시장을 선점하고, 후속 경쟁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점적인 이익을 누리게 마련이다. 선발자는 경쟁자의 싹을 꺾기 위해 공급 확대, 가격 인하 등으로 진입 장벽을 높일 수도 있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선발자의 이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발자가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선발자는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선발자가 독점 이익을 누리기도 전에 후발자가 진입하면 오히려 그동안 투입한 비용을 제대로 못 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선발자의 불이익’이라고 한다.

선발자가 겪게 되는 이익과 불이익의 양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퍼스트 펭귄’이다. 남극에 떼 지어 사는 무리가 먹이를 구하려면 무조건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바닷속에는 바다표범, 범고래 등 천적들이 즐비하다. 이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펭귄이 ‘퍼스트 펭귄’이다. 이런 개념을 주창한 랜디 포시 미국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퍼스트 펭귄을 불이익과 고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보상이 따르는 도전정신으로 설정했다.
영국이 겪은 ‘선두주자의 벌금’
대항해시대에 앞장서 먼바다로 나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 무역에서 오래도록 선발자의 이익을 누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지중해 바깥세상을 알지 못할 때, 두 나라는 세계를 양분했을 만큼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과 향신료에 취해 현실에 안주하며 서서히 쇠퇴했다.

뒤이어 18세기 후반에 영국이 세계의 선두 주자로 올라섰다. 방적기,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을 통해 유럽 변방에서 단숨에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이 누린 선발자의 이익은 오히려 선발자의 불이익으로 바뀌었다. 영국은 신기술에 대한 거부감으로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운동 등이 일어났고, 감자대기근 등의 빈곤문제, 노동계급의 등장에 따른 선거권 요구, 사회주의 확산 등 사회 갈등의 후유증을 제일 먼저 겪어야 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증기자동차를 개발하고도 자동차 속도 규제법인 적기조례를 제정해 스스로 손발을 묶었다.

신기술을 어렵사리 상용화해도 주변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기존 제도에 가로막혀 실패한 사례가 핀란드의 노키아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의 50%를 점유했던 노키아는 1990년대 중반 스마트폰 시대를 예견했다. 10년간 노력한 끝에 2006년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혹독한 실패를 맛봤다. 노키아가 실패한 것은 스마트폰 성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애플리케이션이나 모바일 웹사이트는 물론 와이파이망도 제대로 구축되기 전에 스마트폰을 선보인 게 문제였다. 자동차를 발명했는데 주행할 도로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이듬해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할 즈음에는 앱, 소셜미디어, 와이파이망이 빠르게 갖춰져 본격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이제 초반 선두로는 우승하기 어렵다
독일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완성한 1830년대까지도 전혀 존재감이 없었다.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의 중심이었지만 근대에는 식민지 쟁탈도, 산업화도 뒤처진 후진국이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은 제후가 작은 봉토를 다스리는 체제로 된 느슨한 연합체였다. 상인들에게 따로 통행세를 징수하고 또한 업종마다 힘이 막강한 길드가 신기술과 신산업의 싹을 억제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1830년 독일의 경제 규모는 농업 위주인 프랑스에 비해서도 4분의 1에 불과했다. 영국이 한참 앞서 달리고, 프랑스가 뒤쫓는 가운데 뒤처진 독일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명목상 1000여 년을 유지했던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됐다. 이 제국 내에서 가장 강했던 프로이센의 주도로 1834년 관세동맹이 체결됐다. 통행세가 철폐되고, 하나의 자유무역지대로 통합된 것이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의 전쟁을 연이어 승리하면서 1871년 독일을 통일했다. 이때 주역이 ‘철혈재상’으로 불린 비스마르크였다.

독일은 자동차 철강 기계 화학 군수 등 2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며 빠르게 부상했다. 세계 최초로 내연 3륜 자동차를 탄생시킨 칼 벤츠, 최초의 4륜 자동차를 발명한 고틀리프 다임러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업가였다. 벤츠와 다임러의 경쟁 속에 독일의 산업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독일은 1900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공업국으로 올라섰다. 산업화 50여 년 만에 영국을 추월한 것이다. 선발자인 영국의 시행착오를 거울 삼아 검증된 것만 추종해 압축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선발자의 이익과 승자독식의 세계
19세기 초, 영국의 질주는 보호무역이라는 반작용을 초래했다. 유럽 대륙의 추격자들은 마치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 우화처럼, 아무리 쫓아도 영국을 따라잡기 어려워 자국 시장을 닫아거는 쪽으로 쉽게 기울었다. 이런 보호무역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였다. 그는 낙후된 산업이 성장할 때까지 관세를 통해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유치산업 보호론’을 역설했다. 리스트의 이론은 20세기 들어 뒤늦게 산업화에 나선 개발도상국에 복음이 됐다. 늦게 출발한 개도국은 선진국이 오랜 기간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 자본, 기계 설비 등을 바로 수입해 발전과정을 단축할 수 있었다. 한국도 일본을 모델 삼아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후발자의 이익을 누렸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이런 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에는 생산요소의 대량 투입과 대량 생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다면, 지금은 혁신과 융·복합에 의해 우열이 갈리고, 승자 독식현상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21세기는 ‘퍼스트 펭귄’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는 시대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 스페인과 달리 영국, 프랑스, 독일이 여전히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이유는 왜일까.

② 노키아의 사례처럼 신기술·신제품의 개발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산업생태계’ 구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③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한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mover)’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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