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에서 발견된 6만5000~3만5000년 전 구석기시대 유물들은 육지를 걸어 이주한 사람들의 생활용품이었다. 약 1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의 고산리식 토기는 만주지역·연해주·한반도·일본 열도와 연관성이 있다. 해로를 이용해 이주한 사람들의 유적이다.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유적들을 비롯해 삼양동에서는 청동기 말에서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들이 대거 발견됐다. 서귀포에는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온 서복(서시, 서불)과 연관된 설화와 흔적들이 있다. 진나라의 항해술과 해외 정책을 고려하면 동방 개척이라는 목적도 있었으며, 제주도는 경유지나 도착지였을 가능성도 있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항로의 이해》).

주호는 남방의 물산이 필요한 한반도 소국들에 중요한 무역 상대였다. 일본 열도에는 중국계와 한반도계 상품을 공급하는 해양 물류센터였다.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 등 18개의 한나라 화폐가 출토됐고, 애월읍과 구좌읍의 종달리 패총 등에서도 중국 화폐가 출토됐다. 대부분은 남해안의 소국들과 일본 열도의 소국들이 사용한 일종의 공용 화폐였다. 그렇다면 주호는 이 무역망의 한 거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약 1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의 고산리식 토기는 만주지역·연해주·한반도·일본 열도와 연관성이 있다. 주호국은 남방의 물산이 필요한 한반도 소국들에 중요한 무역 상대였다. 일본 열도에는 중국계와 한반도계 상품을 공급하는 해양 물류센터였다. 주호국은 이후 탐라(耽羅) 섭라(涉羅) 탐모라국(耽牟羅國) 등으로 불렸으며,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