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가 외면한 세계 속의 일본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12-20 08:30  


조선은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란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1811년까지 9차례나 파견했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적 지식을 뽐내던 조선 통신사들이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했다.

왜인이라고 경멸하며 눈길을 돌렸던 배타적인 통신사들도 놀라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수도였던 오사카는 인구가 40만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해 물자가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도시였다. 도시는 정비가 잘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있었고, 수많은 선박이 오고 갔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와 수입품을 전시해놓은 시장들,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도 경이로운 눈초리로 기록했다.

에도(1868년 이후 동경)는 막부의 쇼군이 거주했던 정치수도였다. 고구려 유민들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 등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해양도시였다(김두규,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발전을 거듭하더니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의 각종 인프라가 구축됐고, 인구가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다. 반면에 20세기 초 한양의 인구는 대략 25만명 정도였다.

일본은 발달한 수차를 사용했고, 수리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삼모작을 하고 있었다. 수산업이 발달해 전 해역에서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혼슈 북쪽의 아끼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조선통신사선들이 통과했던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 해협을 지나 오사카에 정박하거나 에도까지 올라와 상업을 했다. 심지어 태평양으로 조업을 나가 17~18세기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 일본 선박들이 표착하는 사례들이 보고됐다. 특히 고래잡이, 즉 포경업은 통신사들을 놀랍게 했다. 우리도 부산의 동삼동 유적,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 등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이듯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했었다. 하지만 이 무렵의 일본은 개량된 작살 등을 사용해 산업 단계로 성숙했다. 그 때문에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출어했고, 그 것을 명분으로 지금까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이다. 에도 막부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선통신사들에게 대마도에서부터 고래잡이 모습을 구경거리로 보여줬다. 포경업이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가는 《해유록》을 남긴 신유한을 비롯한 통신단의 기록에 잘 나와 있다.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났을까?

조선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고수와 국제교류, 상업 발달로 인한 해양세력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 등으로 쇄국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일본의 에도막부도 막부체제라는 특수한 정치체제, 기독교 전파로 인한 사회혼란 등의 문제점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의 틀 때문에 해금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무역과 국제교류의 필요성을 잘 알았으므로 실용적으로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규슈의 나가사사키만에 육지에서 불과 10여 m 밖에다 ‘데지마(出島)’라는 사다리꼴 모양의 조그만 인공섬을 만들었다. 그곳을 개항지로 제한해 서양 및 청나라 등과 무역을 하고 천문학, 지리학, 화학, 토목술, 조선술, 항해술, 무기제조 등의 발전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또 ‘란가쿠(蘭學·네덜란드를 가리키는 단어)’를 정립해 성리학에 심취한 통신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무역품은 도자기였다. 조선에서 천대받다가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무명도공들이 빚은 도자기들은 나가사키의 ‘데지마’나 ‘이마리항’을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됐다. 1650년대 이후에 이마리 자기의 형태가 중국 경덕진 자기의 복제품처럼 변신하는데, 청나라의 쇄국정책으로 도자기 수출이 어려워지자 이마리 자기는 중국 정크선에 실려 캄보디아로 수출됐다. 네덜란드 상인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 유럽으로 운반한 도자기는 무려 520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조선 도공인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유럽에서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돼 도자기 문화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도자기와 더불어 전파된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의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 마네, 고흐 등은 일본문화에 심취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었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들을 파견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는 서양식을 모방해서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다. 일부 지역에는 왜구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조선포로들도 있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뿐 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 살던 아이누(하이)인)들,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열도)를 지나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벌였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무역망’과도 연결됐다(오토모 게이치 등 지음, 《아시아의 바다와 일본인》).

일본이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데는 내부의 발전도 있었지만 막부의 해양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해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특정한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했는데,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배를 근간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에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시켜서 만들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604년에 약 550t급의 주인선을 건조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특별명령을 내려 영국형 범선을 건조하도록 지시한 일도 있었다. 드디어 1613년 9월 15일, 센다이번에서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180여 명으로 구성된 유럽파견 사절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에스파냐의 지도를 받아 건조된 갤리온선인 ‘산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의 아카푸르코에 기항해 멕시코 부왕의 환영을 받았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니아에 도착해 1615년 1월 2일에는 국왕인 펠리페 3세를, 같은 해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7년 뒤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 1620년 8월 24일에 귀국한다. 통상 교섭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귀국했을 때 막부는 이미 기독교 금지령과 대형 함선의 제조 금지령, 해외 도항의 금지령이 내렸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인식을 바꾸고, 세계를 수용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현명한 막부는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만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허락하는 대신에 조건을 걸었다. 즉 입항할 때에는 반드시 해외의 떠도는 소문(정보)을 수집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나가사키 행정당국(부교)에 제출하도록 했다. 일종의 정보 보고서였다.(윤명철, 《한민족의 해양활동 이야기 2》)

일본의 막부는 세계가 해양의 시대로 변모했고, 해양력 강화는 국가의 부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열심히 학습했다. 반면 두 번의 참혹한 전화를 겪고 난 후에도 통신사들은 세계정세는 커녕 일본이 개량된 배를 운영하면서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며 무역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일본의 내해나 강에서 움직이는 소형 배들을 관찰하고, 때로는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독특한 세계관을 고수한 성리학자들의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된 채 명분과 이념을 표방하며 권력투쟁을 벌이다 연달아 전쟁의 참화를 겪어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수십 만의 백성들을 북으로 남으로 끌려가게 했다. 그러고도 다시 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나뉘어 피를 부르는 당파싸움을 벌이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렴주구와 굶주림, 질병의 창궐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통신사 파견이 끊어진 얼마 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75년 운양호를 필두로 3척의 일본 군함을 끌고 왔고, 조선 정부는 저항 한 번 못한 채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경멸하던 ‘왜놈’들에 말이다.

아직도 일본과 중국의 실체를 모르고, 감정이 앞서는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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