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서 교훈 못 얻은 조선…정묘·병자호란으로 신음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12-27 08:00  


‘호란’은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는 뜻이다. 오랑캐는 여진족 계열인 올랑개(兀郞介)부족들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성리학자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과 청나라(여진족)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1627년부터 1637년 초까지 10년간 이어졌고, 1단계 정묘호란(1627년)과 2단계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구성됐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가 한족인 명나라와 여진족(만주)이 주도한 청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미쳤다. 예측과 예방이 가능했지만 저항 없이 항복한 우리 역사의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기도 하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들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러했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후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고,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질서가 재편되고, 정복국가가 탄생할 때는 예외 없이 한국지역을 공격했다.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여요 전쟁’, ‘여원 전쟁’, ‘조청 전쟁’ ‘6.25 전쟁’이 그러하다. 일본열도의 통일과 전환도 유사했는데,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등이다.

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병된 조선군을 일부(강홍립 장군의 군대) 포함한 20만명의 병력으로 후금을 공격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3분의 1 정도 병력을 가진 누르하치는 기마병을 활용해 사르후(薩爾滸)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요동을 장악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팽창을 추진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파악하면서 조선의 위치를 이해하고 정책으로 활용한 사람은 광해군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상황 속에서 세자로 책봉된 후에 분조를 이끌면서 위기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서자 출신으로 선조와 서인들의 견제를 받다가 왕이 된 그는 국제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했고,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1609년에 ‘기유약조’를 맺어 대마도에 제한적인 무역허가를 내주는 대신 관리권 안에 둬 배후를 안정시켰다. 더불어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서양세계와 교류하는 일본이 위협 대상에서 빠진 것을 간파했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는 군사적으로 안전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자주적인 ‘중립외교’를 펼쳤고, 실효성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명분을 중시하며 친명적인 대다수 성리학자에게는 이 같은 정책이 반발을 샀다. 그가 인조반정으로 축출됐을 때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의붓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부도덕이 폐위의 명분이었지만, 더 큰 이유로 제기된 것은‘반명(反明)’ 행위였다. 그만큼 사대부와 성리학자들은 친명적인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조선의 정책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으로 변모했다. 그러자 후금은 명나라와 동맹 관계이며, 자국의 배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조선을 복속시킬 필요성이 커졌다. 더구나 1622년에는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명나라의 장수인 모문룡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조선과 연합작전으로 만주를 공격할 의도가 포착됐다.

결국 정책을 변경한 후금은 1627년 1월에 3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같은달 21일에는 청천강을 건넜고, 인조는 25일에 강화도로 도피했다. 큰 전투가 없이 두 달 만인 3월 3일에 양국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형제지맹”을 맺었다. 불평등한 조약이지만 후금이 조선을 전면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음을 반증한 것이다. 정묘호란은 국제질서의 흐름과 적국의 요구를 간파하지 못한 외교적 패착으로 자초한 패전이었다.

명나라에서는 1627년에 산서 지역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고,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홍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포위하면서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적극적인 친명(向明)세력으로 변신한 조선은 필수적인 공격대상이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후에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한명기, 《병자호란 1.2》).

그런데 명나라의 도움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면적인 군사전을 벌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반면 늦게라도 외교전을 지혜롭게 펼친다면 전쟁의 가능성과 피해는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끝까지 외교활동을 하지 않고, 군사적 대비도 부족던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한 현실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일까? 권력과 부에 대해 집착하는 기득권의 속성 때문일까? 아니면 현장감이 부족하고,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의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백성들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

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는 일이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라고 했다. ‘쌍방책임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크게 변질했고, 임진왜란의 처참한 상황 후에도 반성과 책임의 통감, 개혁정치의 구현은 커녕 관직과 토지, 노예소유를 둘러싼 당파싸움이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라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득권에도 치명타를 입힐 후금의 공격에 비현실적이고, 타자의 입장으로 대응했다. 성리학의 ‘명분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파견한 사실을 의리와 모화사상으로 포장해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었다. 문관 중심의 조정은 청나라의 존재와 요구를 무시했고, 더더욱 친명배금정책을 고수했다.

물론 인조가 군제체를 개편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한 것은 사실이다. 약 9만명 정도로 속오군을 편제시키고, 수군도 3만명 정도로 늘려 전선을 600척 정도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전투력이 강하고, 청과 대결할 수 있는 북방군은 크게 손실을 입었고, 속오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드디어 1636년 12월 9일 청태종이 파병한 12만명의 군사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이 구축한 해양방어체제들을 우회한 대군은 전광석화처럼 남진했고, 봉화체계는 임진왜란 때와 동일하게 고장이 나 조정은 같은달 12일에야 알았다. 청군은 13일에는 벌써 평양, 개성을 거쳐 불과 일주일 만인 14일에는 서울 근교에 도달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탈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만4000명의 병력으로 농성전을 폈다. 하지만 기대했던 조선 군대들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했고, 의병활동도 거의 없었다. 점차 식량이 소진되고, 사기가 떨어지는 와중에 강화도가 1월 22일 오후에 함락당했다. 세자 등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26일에 전해지자, 인조와 조정은 항전의지를 상실했다(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 그리고 1월 30일(음력)에는 불과 47일이라는 단기농성을 끝내고 삼전도로 걸어가 청태조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면서 항복했다. 이때 몇 가지 굴욕적인 조항을 수용했는데, 그중에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예를 지킨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체제로 편입된 채 1876년(강화도 조약, 조일 수호조규) 또는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자주성을 양보하고, 간섭을 받았다.

현실을 잘 모르는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대참사를 경험하고도, 반성 없이 또 실패를 자초했다. 백성들은 또 한 번 피해를 입었고, 무려 50만~60만명이 포로로 잡혀 겨울날 고향을 떠나 만주로 끌려갔다.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는 기준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역사에 죄를 지으면, 그것이 간신이다. 미래가 매우 불투명한 현재. 훗날 간신으로 기록될 인물들이 되도록 적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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