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도 뚫은 신세계의 '비밀 병기'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입력 2021-01-20 17:21   수정 2021-01-20 17:36

전 세계에서 연 매출 2조원이 넘는 백화점(단일 점포 기준)은 딱 5 곳이다. 신세계 강남점이 그 중 하나다. 2019년 말 ‘2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프랑스(갤러리 라파예트), 영국(해러즈)의 백화점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신세계 강남점의 위상은 올해 글로벌 ‘톱3’의 반열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형적인 성장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신세계만이 갖는 상징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SNS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블로거가 고가의 청소기를 산 후 이용 후기를 남겼다. “이거 정말 비싸지만 써보면 신세계입니다! 그냥 신세계도 아니고 신세계 본점(강남점) 수준이에요” 신세계는 백화점을 넘어 ‘럭셔리(고급스러움)’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VIP 마케팅 전략이 신세계의 성취 밑거름
신세계의 무엇이 이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했을까.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단일 요인을 꼽자면 바로 신세계만의 VIP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세계는 2017년 업계 최초로 ‘레드’ 등급을 신설, VIP를 세분화하는 마케팅 기법을 도입했다. 미래의 VIP가 될만한 후보군을 집중 타깃으로 삼았다.

이 과정을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신세계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고객들이 남긴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했다. 대다수의 기업들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전환)을 강조하지만 실제 현실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를 전문가들은 ‘디지털 자기 기만’이라고 부른다. 신세계는 이 함정에서 벗어났다.

‘고객의 시간을 점령하라’는 오프라인 유통의 제1 원칙을 VIP마케팅과 결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신세계는 공간의 힘을 믿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다는 의미의 백화점(百貨店), 다시 말해 빅박스 스토어(big box store)로서의 공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대신에 신세계는 ‘럭셔리’로 무장한 공간을 최대한 쇼핑객들의 삶과 일치시키는데 주력했다. 넓어진 VIP 등급 덕분에 ‘신세계만의 비밀의 문’에 들어선 젊은 VIP 후보들은 마치 덤불숲 넘어 황금빛 열매를 찾듯이, 신세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2030 세대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신세계의 세련됨은 더욱 빛을 발했고, 이는 기존 VIP에게도 득이 됐다. 선순환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세계의 신개념 VIP 마케팅이 어떻게 나왔는 지를 살펴보려면 2016년 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신세계는 수년 간을 공들여 일명 ‘5대 프로젝트’를 완결했다. 하이라이트는 본점인 강남점의 리뉴얼 증축이었다. 정유경 총괄사장의 야심작은 그 해 2월 베일을 벗었다. 3월엔 부산 센텀시티점 B관을 오픈했다. 8월부터 12월까지 신세계는 하남점, 김해점, 대구점 등 무려 3개점을 잇따라 열었다.

유통업에 규모의 확장은 필연적인 숙명과도 같다. 점포가 많아야 이른바 매입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백화점의 이익률과 직격되는 사안이다. 특히 백화점의 얼굴과도 같은 명품 브랜드와의 협상력을 높이려면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야 했다. 전국에 35개 백화점을 보유한 롯데와 비교해 신세계 점포는 5대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전까지 8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신세계를 둘러싼 업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리테일(소매 유통) 산업은 격변 그 자체였다. 특히 백화점에 타격이 컸다. 125년 전통의 미국의 대표적 중저가 백화점 체인인 시어스가 2017년 한 해에 381개 매장(K마트 포함)을 줄이다가 2018년 결국 파산했다. 2017년에만 미국에서 무려 8053개의 리테일 매장이 철수했다. 영국에서도 2016년 88년 역사를 가진 중저가 백화점 체인인 BHS가 파산했다(황지영 著『리테일의 미래』에서). 백화점은 마치 종말을 고하는 듯 했다.
한국의 상황은 해외보다는 나았지만, 정체 상태를 면치 못했다. 2017년 국내 백화점 매출은 29조3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 하락했다. 명품조차 온라인으로 소비하는 젊은 세대의 등장은 백화점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5대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완수하려면 신세계의 새 점포에 고객이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했다.
VIP마케팅을 위한 ‘비밀 병기’
신세계의 마케팅을 총괄하는 영업전략실은 고객을 늘릴 방안을 찾기 위해 데이터에 눈을 돌렸다. 그들에겐 ‘비밀 병기’가 있었다. 신세계는 2015년부터 데이터 사이언스 전공자들을 뽑기 시작했다. KAIST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대학에서 빅데이터 분석을 전공한 석·박사들이다. 그들은 대리, 과장의 직함을 달고 영업전략실에 배치됐다. 창사 이래 처음하는 시도였다.
신세계의 ‘마케터’들은 방문객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싶어했다. 온라인 쇼핑이라면 검색과 결제에 관한 데이터가 무궁무진했겠지만, 오프라인에선 데이터 분석에 한계가 많았다. 오프라인 쇼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궁리한 끝에 신세계는 ‘고객의 시간’에 주목했다. 신세계를 얼마나 자주 방문하는 지, 한 번 방문하면 어디를 가고, 얼마나 머무는 지 등을 분석했다.
마케터들이 기본 골격을 잡자 데이터 전문가들은 체류 시간을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를 가져왔다. 신세계 관계자는 “결과를 보자마자 눈이 확 트였다”고 했다. 신세계를 마치 안방처럼 자주 오는 이들, 자주 오지는 않지만 한 번 왔을 때 통 크게 지르는 고객 등 다양성이 눈에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이들 대부분은 2030세대였다. 이른바 밀레니얼(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이라고도 불리는 세대다.
“옷차림으로 손님 지갑을 판단하지 말아라”
2017년 무렵, 신세계의 마케터들은 명품 등 럭셔리 상품에 대한 소비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시쳇말로 20대 젊은 남녀가 수백만원짜리 신발을 일시불로 구매하는 일이 자주 목격됐다. 명품 매장 직원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돌았다. “옷차림과 얼굴로 손님 지갑을 판단하지 말아라”
영업전략실이 분석한 데이터 결과는 눈대중으로 봐왔던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을 뒷받침했다. 신세계는 이들을 ‘VIP의 세계’로 끌어들일 방법을 모색했고, VIP 등급을 기존 5단계에서 6단계로 확장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신설 ‘레드’ 등급은 다른 등급과 달리 조건이 좀 더 세분화됐다. ①연간 구매금액 400만원 이상(동시에 구매 일수 연 24회 이상), ②분기 구매금액 200만원 이상(구매 일수 1회 이상), ③분기 구매금액 100만원 이상(구매 일수 6회 이상) 등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1~5등급의 산출이 연간 구매액(5등급인 ‘블랙’은 연간 800만원 이상) 기준인 데 비해 ‘레드’는 분기 단위로 선정 주기를 짧게 했다는 점이다.
‘레드’ 등급이 되면 신세계 전 점에서 멤버스바 이용이 가능하고, 3시간 무료 주차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패션, 잡화 장르 정상 상품 최대 7% 할인, 신세계아카데미 할인 혜택 등도 있다. 신세계는 젊은 VIP 고객들의 취향을 겨냥한 베이킹, 가죽공예, 스니커즈 커스터마이징, 명상 호흡법 등 새로운 분야의 문화 클래스를 혜택으로 내세웠다.
‘밀레니얼’을 품은 신세계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이 같은 대우에도 ‘신흥 VIP’들은 열광했다. 신세계 마케터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밀레니얼 세대들은 세분화된 VIP 단계를 마치 게임처럼 받아들였다. 등급을 유지하거나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 그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기존 VIP들이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지향하며 스스로의 삶을 노출시키길 꺼리는 것에 비해 젊은 VIP들은 정반대의 행태를 보였다. 신세계 관계자는 “멤버스바는 매일 신세계만의 커피를 VIP들에게 선보이고, 컵 등 기물들도 주기적으로 젊은 감각을 반영해 바꿔준다”며 “레드 등급 회원들은 멤버스바에서 마시는 커피를 SNS 등 다양한 채널로 공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MZ세대의 ‘플렉스 문화’는 신세계에 구전 마케팅 효과를 덤으로 안겨주고 있다.
신세계의 VIP 전략은 밀레니얼 세대들을 끌어 모으며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신세계 고객 중 2030세대의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7% 신장했다. VIP 고객 중 20~30대 고객 비중은 약 30%에 달한다.
강남점 1층, ‘명품 브랜드’ 쇼룸
밀레니얼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신세계는 공간의 혁신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같은 제품이라도 어디에서 파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다. 강남점 1층에 있는 ‘더 스테이지(The Stage)’가 대표적이다. 로저비비에, 샤넬, 디올, 버버리, 까르띠에, 프라다 등이 이곳에 ‘팝업 스토어’를 냈다. 신세계는 이 공간을 판매처가 아닌 국내외 유명 브랜드들의 ‘쇼룸’으로 구성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백화점 1층 한복판에 ‘명품 공간’을 연출해, 매장에 들어가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꾸며 심리적 문턱을 낮췄다. 공간의 혁신을 통해 브랜드는 추가 임대료 없이 잠재적인 고객과의 접촉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백화점은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이미지를 얻고 있다.
VIP 마케팅 영역 확장
VIP 등급 세분화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신세계는 VIP 마케팅의 영역을 확장 중이다. 지난해 장르별 매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식품, 생활 부문 VIP까지 선보였다. 절대적인 구매액이 크지 않더라도 특정 장르를 주로 소비하는 고객을 VIP로 선정해 특별 대우를 해주며 충성도를 높인다는 전략이다.
프리미엄아울렛에도 VIP 마케팅을 도입했다. 2018년 여주프리미엄아울렛 회원들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우수 고객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20%에 달했다. 그 해 신세계사이먼은 전용 라운지, 파킹존 등 VIP만을 위한 서비스를 도입했다.
지난해 10월엔 부산점으로 VIP 서비스를 확대했다. 라운지 내 별도의 컨시어지 룸을 조성해 업계 최초로 여주점의 해외 명품 브랜드를 원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컨시어지 서비스도 시작했다.
■ 마케터를 위한 포인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리테일 산업의 지형을 뿌리에서부터 바꿔놓고 있다. 온·오프라인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현실과 가상, 온·오프를 통합한 ‘옴니 채널’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곳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백화점 같은 오프라인 유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리테일러(retailer)들로선 코로나19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시련이자 도전이다. 코로나19가 가져 온 기업 환경의 변화는 리테일 산업 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의 마케터들에게도 해결해야 할 숙제다.
질문은 간단하다. 코로나19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들은 무엇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려낼 수 있느냐다. 클릭 한 번이면 다음 날 새벽에 문 앞까지 배송해주는 온라인 쇼핑은 그 세(勢)를 더할 것이다.
거꾸로 쇼핑의 경험, 특히 누군가로부터 대접받고, 대우받는 경험은 코로나19 이후 다시 복원될 리테일 산업의 핵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의 ‘무릎 서빙’이 코로나 시대에 더 주목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점에서 신세계의 차별화된 VIP마케팅은 백화점이 코로나의 파고를 넘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향타 역할을 할 것이다. 고객의 시간을 점령할 수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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