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4년째 제자리걸음인 '프레카리아트 정부'

입력 2021-01-05 17:48   수정 2021-01-06 00:37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신분이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위태롭다는 뜻의 영어 단어(precarious)와 밑바닥 노동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를 합친 말이다. 2000년대 들어 영국의 사회·경제학자들이 쓰기 시작했고, 2016년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이 토론 주제로 다루면서 주목받았다.

프레카리아트 논의에 불을 댕긴 것 가운데 하나가 영국 리버풀 시(市)당국의 ‘고용통계 분식’ 사건이다. 쇠락한 항구도시 리버풀이 2015년 갑자기 ‘일자리 붐’이 일면서 실업률이 10여 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통계를 발표한 것이다. 시민들 생활이나 지역 경제가 나아진 게 없는데 뜬금없는 ‘일자리 호황’이 나타난 이유가 곧 밝혀졌다. 시 정부가 1주일에 두 시간, 주중 나흘간 하루 30분씩만 일해도 취업으로 간주하는 통계기준을 이용해 세금 범벅의 ‘무늬만 일자리’를 무더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리버풀의 ‘세금 일자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는 그해 무료급식소를 이용한 667명 가운데 319명이 ‘취업자’라는 사실이 보여줬다.

영국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는 “리버풀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발표는 푸른 잔디가 분홍빛 영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짓말”이라고 쏘아붙였다. “취업은 생계를 해결해줄 만큼의 소득이 뒤따를 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고용통계를 접한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시 생각해야 할 쪽은 정부와 경제학자들이다” 등의 지적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올해 3조2000억원의 세금을 투입해 104만 개의 ‘직접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더니, “그 가운데 80%를 1분기 안에 조기 채용하겠다”고 한 고용노동부 장관의 엊그제 발표가 ‘리버풀 일자리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직접일자리의 83만 개는 저소득 노인들에게 월 25만~60만원을 쥐여주고 월 30시간 쓰레기를 줍거나, 형광 조끼를 입고 교통안내를 맡게 하는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청년들에게 6개월~1년 동안 월 200만원 안팎을 주는 일자리도 8만 개 남짓 제공하기로 했지만 상당수가 ‘세금 낭비 전시용 일자리’라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해 행정안전부의 ‘공공데이터 일자리’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오픈채팅방에 “업무시간은 8시간인데 실제 일하는 시간은 1시간이면 충분했다” “사실상 ‘돈 주는 독서실’이었다” 등의 자조 섞인 힐난을 쏟아냈는데도 올해 이런 일자리를 더 늘리기로 했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해마다 세금을 쏟아붓는 ‘직접일자리’를 늘리면서 내건 게 ‘마중물론(論)’이다. 민간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여의치 않으니 우선 정부가 공공일자리를 늘려서라도 실업자를 줄이겠다는 얘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중물’ 주장을 폈다. 땅 밑의 물을 펌프로 끌어올리기 위해 잠깐 퍼붓는 게 마중물이다. 그런 마중물을 임기 끝 무렵이 다 되도록 퍼붓고 있다면 펌프가 단단히 고장 난 게 틀림없다.

펌프가 제 역할을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민간기업과 사업자들이 고용을 늘리지 못하는 것을 정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가 민간의 고용 활력을 높이는, 아니 최소한 꺾지는 않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짚을 때가 됐다. 요즘 기업들 곳곳에서 “정부와 여당이 기업에 적대적인 정책과 입법을 밀어붙여 경영 활동에 감당하기 힘든 족쇄가 채워졌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기업 경영권을 제한하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 해고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과 불법 파업에 대한 회사 측 대응방안 봉쇄 등을 담은 노조관련법 개정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보호해주겠다”고 큰소리쳐 온 중소기업들의 반발이 특히 거세다.

정부와 여당의 ‘정책·입법 폭주’ 바탕에 깔려 있는 “우리만이 정의롭다”는 착각과 독선이 무엇보다도 걱정스럽다. “이런 식으로 정책을 펴면 경영 손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는 기업들 하소연을 “정의를 이루기 위한 불편이니 잔말 말고 받아들이라”고 윽박지르는 게 몸집만 비대해진 ‘운동권 정부’의 요즘 행태다. ‘정의’에 정말 자신 있고 당당하다면 국민에게 “일자리가 파괴되는 불편 따위는 잠시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세금을 잔뜩 퍼부어가며 저소득 노인과 청년들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무늬만 일자리’로 고용통계를 분식하는 짓은 비열하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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