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냉전의 추억

입력 2021-01-10 16:57   수정 2021-01-11 00:20

지난달 12일 영국 소설가 존 르 카레가 사망했다. 20세기 중엽에 영국의 방첩기구(MI5)와 첩보기구(MI6)에서 일했던 경험을 소재로 삼아, 그는 냉전 시기 첩보 전쟁을 그린 소설들을 썼다. 초기 작품에서 ‘스마일리’라는 깊이를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문학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얻었다. 1990년대 초엽에 공산주의 러시아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고 KGB가 위협적 모습을 감추자 그는 마약 조직과 테러리스트 조직을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런 조직은 KGB에 비길 수 없는 작은 악한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작품들의 흥미는 어쩔 수 없이 줄어들었다.

아쉽게도, 그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지 않았다. 그의 작중 인물들 가운데 자신의 신념에 가장 충실한 인물은 러시아 첩자 ‘칼라’다. 역사상 가장 사악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작품에 어리지 않는다는 사정은 그의 작품들의 깊이를 줄였다.

12월 26일엔 영국의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가 죽었다. 그는 1948년 11월부터 서울의 영국공사관에서 일했는데, 6·25전쟁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1953년에 송환됐을 때 그는 KGB의 첩자가 돼 있었다. MI6에서 일하면서 그는 동유럽의 영국 정보원들의 정체를 KGB에 알렸고 40명 넘는 정보원이 살해됐다. 1961년에 망명한 폴란드 요원이 그를 이중간첩으로 지목하면서, 그는 체포돼 42년 형을 받았다. 그러나 1966년에 탈옥해서 러시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죽음은 이제 냉전이 한 세대 전에 끝났음을 일깨워준다. 불행하게도, 세상은 지난 30년 동안에 훨씬 더 위험해졌다. 핵전쟁의 위험을 안고 살았어도, 그때 자유주의의 세계는 전체주의 세력을 압도했다. 이제 빠르게 부상한 전체주의 중국은 온 세계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전쟁의 위협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크게 늘렸다. 이제 정보전쟁(cyber war)은 상시적이다. 미국 정부의 핵심 부서들이 러시아 해커들에게 뚫렸다는 보도는 이 점을 일깨워준다. 여러 해 전부터 외계는 잠재적 싸움터가 됐고, 강대국들은 앞다퉈 우주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군비 경쟁을 가속시키고 군축을 어렵게 만든다. 모든 무기가 인공지능으로 제어돼 사람들의 통제에서 점점 벗어난다. 자연히, 인공지능 기술에 관한 한, 산업용과 군사용의 구분은 뜻을 잃었다. 군축의 핵심적 조건은 검증인데, 인공지능은 검증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일한 대응은 억지(deterrence)다. 자연히 군비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냉전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일면서,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긴 그때는 적과 친구의 구별이 명확했고 그저 적을 경계하면 됐다. 한·미동맹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궁극적 바탕임을 우리 모두가 알았다. 정권이 권위주의적이었어도, 정치 지도자들의 나라를 지키려는 뜻만은 모든 시민이 확신했다. 무장 간첩들이 나타나면, 다 잡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경계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해야 할 처지를 예견하고, 천신만고 끝에 원자력 산업을 일으켰으며 원자로를 수출할 만한 실력을 쌓았다. 우리는 그런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제 우리는 깨달았다, 그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님을.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게 살해돼 시신이 불에 타도, 우리 군대 지휘관들은 그 광경을 줄곧 관찰만 했다. 우리 가상화폐거래소들이 북한 해커들에게 뚫려서 시민들의 재산이 탈취돼도, 그 돈이 우리나라를 노리는 데 쓰이리라는 것이 분명해도, 우리 정부는 태연하다.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일을 처벌하는 위헌적 법률을 번개처럼 만든다. 북한 핵무기의 위력이 날로 심각해지는데, 우리 대통령은 우리가 핵무기를 갖추는 데 필요한 원자력 산업을 기어이 허물려고 애쓴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은 처음이다. 그래도 깨달음은 중요하다. 깨달음이 나온 뒤에야, 비로소 행동이 나올 수 있다. 새해엔 그런 깨달음이 우리 사회에 퍼져나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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