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그 많던 성냥은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21-01-11 17:08   수정 2021-01-12 00:09

중학교 시절 생활기록부 취미란에 우표와 성냥갑 수집을 적곤 했다. 우표 수집이야 당시 청소년의 필수 과정이었지만, 성냥갑 수집은 남자 가족들 덕분에 생긴 취미였다. 세 명의 대학생 형들이 홍보용 성냥갑을 거의 매일 가져왔다. 주로 다방과 맥줏집, 식당 등에서 제공한 휴대용 성냥갑들은 담배 한 갑 피우기에 적합한 크기였다. 성냥갑에 인쇄된 갖가지 도안과 글자들은 당대 최첨단 디자인이어서 수집하는 보람이 상당했다. 한때 100여 갑까지 모으며 명동에 가면 ‘필하모니’에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고, ‘카페 떼아뜨르’에서 차 마시며 연극을 볼 수 있겠다고 상상하곤 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골 할아버지 방의 소품들이 기억난다. 늘 곰방대를 물고 계시던 할아버지 옆에는 나무 재떨이, 잎담배인 풍년초 한 통과 그것을 말 수 있는 종이, 그리고 비사표 사각 통성냥이 놓여 있었다. 이 통성냥은 시골집 모든 방과 부엌의 필수품이었다. 담배 피울 때뿐 아니라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 저녁 호롱불을 밝힐 때, 심지어 한밤중 화장실 갈 때도 켜야 했으니 농촌의 하루는 늘 성냥통과 함께였다.

더 오래된 기억, 한글을 깨치고 읽은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나를 매번 울렸다. 어린이를 이처럼 슬프게 하는 안데르센은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라고 나름의 블랙리스트도 만들었다. 동화를 발표한 1845년은 성냥이 핵심 생필품이던 시기, 당시 덴마크는 빈부 격차가 극심한 유럽의 빈국이었다. 주폭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벌이를 강요해 매서운 북구의 겨울 거리로 내몰았다. 물건을 못 팔아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소녀가 추위를 이기려고 성냥을 켜다가 결국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다는 사회 고발적 동화였다. 나이를 먹어 온전히 이해하니 더 슬픈 이야기였다.

영국 화학자 존 워커가 1827년 발명한 마찰식 성냥은 세계로 퍼져 60년 만에 개화기 한반도에 전파됐다. 1917년 인천에 본격적인 성냥공장 조선인촌(燐寸·막대성냥의 일본어)이 설립돼 한국의 일상생활을 바꿔놨다. 해방 후 전국에 300여 개 공장이 흥할 정도로 성냥 산업은 중요한 소비재 산업으로 발전했다. 내 청소년기는 그 최전성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일회용 라이터 ‘불티나’가 등장하고 곧이어 값싼 중국산 라이터가 거의 무료로 배포되면서 성냥과 성냥공장은 일시에 증발하고 말았다.

편리하기야 라이터가 낫겠지만 그래도 성냥개비를 갑에서 꺼내 확 켜는 아날로그적 동작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라이터로는 이를 쑤실 수도, 귀를 팔 수도, 성냥개비 수수께끼를 낼 수도, 장난 중 가장 재밌다는 불장난을 할 수도 없다. 성냥의 문화사가 우리 세대의 기억으로 끝나는 게 너무도 아쉽다. 팔각형 유엔성냥은 가장 진화한 마지막 통성냥이었다. 마침 인터넷 쇼핑에서 재고품을 판다니 더 늦기 전에 사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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