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마주하라, 상처는 스스로 아물지 않는다

입력 2021-01-28 17:08   수정 2021-02-05 18:13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무인도, 바위섬 중앙의 사이프러스 나무들
바위 절벽의 제단과 납골당의 문, 노를 젓는 사공과 흰옷을 입은 신비의 인물
망자를 추모하는 이 그림은 어떻게 치유의 그림이 됐을까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리 라파폴트는 미술 감상이 감정 치유 및 심리적 불안 증상인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cklin·1827~1901)의 걸작 ‘죽음의 섬’은 정신적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심리적 문제 해결을 돕는 예술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로 죽음을 섬에 비유한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게르만의 영혼’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죽음의 섬’은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중산층 가정에 복제화가 걸려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국민 그림’이었다. 뵈클린이 1880~1886년 ‘죽음의 섬’ 버전을 다섯 점이나 제작한 사실도 당시의 폭발적인 인기를 말해준다. 러시아 출신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1936년 출간한 소설 《절망》에서 주인공 게르만의 집에 초대받은 오를로비우스가 ‘죽음의 섬’ 복제화를 자세히 살펴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대부분의 베를린 주택에서 이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소설이 증명한 것이다. 독일 나치스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이 그림의 세 번째 버전을 소장한 기록도 작품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죽음이 주제인 그림이 어떻게 상처받은 감정을 치료하는 자기 치유의 전형이 될 수 있었을까.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보자.

고요한 바다 위에 우뚝 솟은 바위섬 입구를 향해 배 한 척이 조용히 노를 저으며 다가간다. 배 안에는 노를 젓는 사공과 흰옷을 입고 서 있는 뒷모습의 인물, 그 앞에는 흰색 천으로 감싼 관이 놓여 있다.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무인도, 바위섬 중앙의 죽음을 상징하는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제단과 납골당의 문들, 유령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옷을 입은 인물과 시신을 담은 관은 바위섬이 죽은 자들의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흰옷을 입은 인물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는 왜 배에 관을 싣고 섬으로 가고 있을까? 스위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알프레드 슈미드에 따르면 신비의 인물은 뵈클린의 후원자 마리 베르나다. 결혼 1년 만인 1865년, 남편과 사별한 베르나는 재혼을 앞둔 1880년 4월 피렌체에 있는 뵈클린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 뵈클린은 미술품 수집가 알렉산더 귄터가 주문한 ‘죽음의 섬’ 첫 번째 버전을 그리고 있었다. 미완성작인데도 신비한 분위기에 감동받은 베르나는 화가에게 세상을 떠난 첫 남편을 추모하는 그림을 의뢰했다. 아울러 바위섬으로 향하는 배에 자신의 모습과 남편의 관을 그려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두 번째 남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그녀로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과 망자가 된 첫 남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상징적인 작별 예식이 필요했다. 죽은 자에게 재혼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무의식에 깃든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한 여인의 간절한 바람이 ‘죽음의 섬’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망자를 추모하는 이 그림은 뵈클린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도 했다. 뵈클린은 인생에서 유독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 약혼자와 사별했고, 그의 열네 자녀 중 여덟 명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수차례 사별의 슬픔을 경험한 뵈클린은 망자들이 세상의 소음이 사라진 고요한 침묵의 세계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기를 바랐다. 즉, 상처받은 기억이나 감정을 놓아 보내야만 했던 예술가와 후원자의 욕구가 그림에 반영돼 치유 그림이 태어나게 됐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고요와 침묵의 공간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 작곡가,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줬다. 미술에서는 조르조 데 키리코, 살바도르 달리, HR 기거, 음악에서는 1909년 교향시 ‘죽음의 섬’을 작곡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연극에선 1907년 ‘유령 소나타’를 연출한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버그, 영화에서는 1945년 영화 제작자 발 루튼과 마크 롭슨 감독이 합작한 공포영화 ‘죽음의 섬’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에스더 M 스턴버그는 “치유 공간은 인간의 감정과 기억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곳은 뇌와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의 섬’은 상처받은 기억과 감정을 치료할 수 있는 치유 공간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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