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world View] '부채의 화폐화' 논쟁…커지는 '잃어버린 10년' 우려

입력 2021-02-02 17:43   수정 2021-02-03 00:25

최근 들어 ‘부채의 화폐화(bond monetization)’ 문제를 놓고 나라 안팎에서 논쟁이 뜨겁다. 미국은 조 바이든 정부의 경제 컨트롤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큰 행동전략(act big)으로, 한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피해 보상 차원에서 재원 마련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부채의 화폐화란 재정당국(한국의 경우 기획재정부지만 최근에는 국회가 주도)이 발행한 적자 국채를 중앙은행이 사주는 정책을 말한다. 재원의 원천을 자산이 아니라 부채로 한다는 점과 시장이 아니라 발권력을 갖고 있는 중앙은행이 나선다는 점에서 모든 정책적 여지가 소진됐을 때 가장 마지막에 동원하는 비전통적인 재정 수단이다.

모든 경제 정책은 양면성이 있다.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작용이 크게 생겨 정책당국이 경제를 망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부채의 화폐화와 같은 비전통적인 정책일수록 ‘정부의 실패’로 연결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위기 국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정상화하는 출구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세계 부채 277조달러…GDP의 3.65배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세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진 부채는 총 277조달러, 우리 돈으로 30경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한 해 세계 200여 개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금액의 3.65배에 달하는 규모로, 모든 세계인이 앞으로 3년8개월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털어 넣어야 갚을 수 있는 수준이다.

세계 부채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돈이 많이 풀린 데다, 기준금리를 제로 혹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낮춰 경제 주체가 빚의 무서움을 모르게 하는 ‘부채 경감 징후군(debt deflation syndrome)’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자 조급해진 정책당국(은행도 가세)이 가계와 기업에 부채(대출)를 권장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부채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선진국의 공공부채가 주로 늘어났지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의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세계 부채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금융위기 전 22%에 불과했으나 작년 말 60%에 육박하는 등 10년 남짓 기간 동안 세 배 가까이 급증했다.


앞으로 부채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해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진 데다, 코로나 사태와 같은 위기가 계속됨에 따라 빚을 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국채금리가 오르자 빚이 또 다른 빚을 부르는 ‘나선형 악순환 고리’에 빠질 것을 우려한 미국 중앙은행(Fed)이 서둘러 국채금리 안정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부채가 과도하게 증가하면 가장 우려되는 것이 ‘통화정책 전달경로(통화 공급→금리 하락→총수요 증가→경기 부양)’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금융과 실물 간 따로 노는 ‘이분법 경제(dichotomy)’에 처하게 돼 돈을 푼다고 하더라도 실물 경제에 들어가지 않고 금융권에서만 맴돌아 자산 거품이 쉽게 발생한다. 최근과 같은 상황이다.

재정정책은 시차가 길어진다. 시차는 정책 입안에서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내부(행정) 시차’, 정책 확정 이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외부(집행) 시차’로 구분된다. 각종 선거 표심에 가장 민감한 부채가 많아지면 내부 시차가 길어지는 폐단이 있다. 확정된 재정정책도 공공지출 증가가 민간 수요를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로 경기 부양 효과가 반감된다.

특히 한국은 7대 취약국으로 분류될 정도로 가계부채가 많은 국가다. 국제결제은행(BIS)이 가계부채 건전성을 평가하는 ‘신용 갭(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호드릭-프레스코트 필터로 구한 장기 추세에서 벗어난 정도)’은 4%포인트가 넘어 주의(2%포인트 미만 ‘보통’, 2∼10%포인트 ‘주의’, 10%포인트 이상 ‘경고’) 단계다.

부채를 갚을 능력인 원리금상환부담률은 7대 가계부채 취약국 중에서도 가장 떨어지고 저소득층일수록 더 떨어진다. 이런 여건에서 부채의 화폐화 추진 등으로 대출금리가 올라가면 빈부 격차가 더 확대되고,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소비 성향이 높은 점(안도 모딜리아니의 상대소득가설)을 감안하면 경기까지 침체될 가능성이 높다.
대출금리 상승으로 신용불량자 급증 가능성
우려되는 것은 올 들어 각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여부와 관계없이 대출금리가 일제히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정적자가 심한 국가일수록 대출금리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은 재정지출이 부쩍 증가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빚을 내 아파트와 주식에 투자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신용불량자가 갑작스럽게 급증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은 그 어느 국가보다 금융과 실물 간의 연계성이 떨어져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한 국가다. 통화유통속도, 통화승수와 같은 경제활력지표가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지 오래됐다. 권종별 현금결제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5만원권은 10장 발행하면 2장만 회수된다. 좀비 경제 국면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치권이 각종 규제를 쏟아내고 정책당국이 정책을 남발하고 있는 점이 돈이 돌지 않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가계는 지원금을 받아도 소비보다 저축을 하고 기업은 투자보다 현금 확보에 열을 열리고 있다.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돈맥경화가 장기간 지속되면 ‘역설’이나 ‘수수께끼’라는 종전의 관행과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뉴노멀 현상이 나타나 정책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때 정책 수용층마저 SNS 등을 통한 연대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경우 경제는 더 혼돈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
국민·정부·기업 집단지성 통해 위기 극복을
혼돈의 시대에 한국 경제는 유독 위기설에 민감하다. 정치권과 정책당국자가 알아둬야 할 것은 대내외 여건이 악화될 때마다 ‘통계 수치상의 위기’가 아니라 정책 결정과 경제 운용 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시스템상의 위기’가 위기설을 낳는다는 점이다. 많은 정책을 내놓거나 추진하기보다 경제 시스템을 안정화하는 대책이 중요하다.

최근 논쟁이 거세지고 있는 ‘부채의 화폐화’와 같은 자신의 자리나 소속 정당의 이익을 위해 제안 또는 추진된 정책은 표심을 얻기보다 우리 경제의 혼란과 위기설을 키울 가능성이 높다. 뉴노멀 정책 여건에서는 특정인(대통령도 포함)에 의존하기보다 국민 모두의 집단 지성을 구해 대처해 나가는 ‘시나리오 플래닝’ 기법이 더 효과적이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주연이 되는 ‘M-트로이카(Management-troica)’ 체제를 구축해야 할 때다.
국가채무비율과'국가 부도'
준정부기관 많은 한국…좁게 보면 '재정 건전국', 넓게 보면 '부도 우려국'
국가가 어려운 때일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정부 부처 수장과 같은 국력을 한군데로 모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국력을 낭비하는 경우다. 한국은 코로나 사태와 같은 국난을 당할 때마다 국력을 소모하는 세 가지 고질적인 논쟁이 있다. 국가채무, 외환위기, 화폐개혁 논쟁이다.

3대 논쟁 중 코로나 사태를 맞아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원하는 문제와 관련해 가장 뜨거운 것이 ‘국가채무 논쟁’이다. 현 정부 들어 재정지출이 가뜩이나 많은 상황에서 국민 모두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 국가가 부도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흥국에서 이 같은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특정 국가가 부도 날 가능성은 국민소득 대비 국가채무 비율로 판정한다. 선진국은 100%, 신흥국은 70%를 넘지 않으면 재정이 건전한 국가로 분류한다. 최근 들어서는 같은 선진국과 신흥국에 속했다 하더라도 국가별로 차별화가 심해 판정 기준을 좀 더 세분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국가채무는 소속 기관과 부채의 성격에 따라 세 가지 개념으로 구분된다. 협의 개념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갖고 있는 현시적 채무다. 광의 개념은 협의 개념에다 공기업이 갖고 있는 현시적 채무가 더해진다. 최광의 개념은 광의 개념에다 준정부기관이 포함되고 모든 기관의 현시적 채무뿐만 아니라 묵시적 채무까지 포함된다.

세 가지 개념대로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을 따져보면 협의 개념으로는 45%, 광의 개념은 73%, 최광의 개념으로는 145% 내외로 추정된다.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세 가지 개념별로 국가채무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이 지나치게 많고 국가채무 관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속해 있는 신흥국의 위험 수준이 70%인 점을 감안할 때 협의 개념을 적용하면 ‘재정 건전국’, 광의 개념으로는 ‘위험 경고국’, 최광위 개념으로는 ‘국가부도 우려국’으로 분류된다. 한국의 대외 위상이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에 놓여 있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신흥국처럼 ‘국가채무 위험수준 70% 룰’을 적용받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다.

국제적으로 재정건전성 분류 기준은 ‘협의 개념’으로 삼는다. 내부적으로 국가채무 논쟁이 일 때마다 ‘한국 재정은 건전하다’는 국제 평가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세계 3대 평가사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과 전망을 유지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문제는 재정이 건전하다면 현대통화론자(MMT)의 주장처럼 “빚을 내 더 써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부채의 화폐화’를 주장하는 일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근거이기도 하다.

국가채무는 평상시에는 협의 개념이 적용되다가 위급하면 최광의 개념이 부각될 때가 많다. 21대 국회에서는 개념별로 국가채무 비율이 차이가 나는 점이 개선되도록 부채의 화폐화 논의에 앞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대한 정비부터 해야 한다.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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