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우리땅, 간도는?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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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07 08:00  

독도는 우리땅, 간도는?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백두산정계비는 무엇을 알려줄까?

국경 문제는 영토의 넓이, 자원의 소유권, 지정학적인 가치를 넘어 존재의 명분과 자의식 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망각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

백두산정계비의 내용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우선 국경 문제의 본질과 남만주 일대의 역사적인 상황,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대부분 여진족의 ‘생활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에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조선과 ‘강도화맹’을 맺으면서 후금은 강역 문제를 거론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삼·녹용 등을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두 강을 몰래 건넌 조선인들로 문제가 발생했다. 강희제 때에 들어서면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이에 청나라가 정계비를 세운 목적과 배경, 경위 등을 이를 주도한 강희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국과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삼번의 난’마저 진압한 강희제는 시조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장백산)의 성지화 사업이 필요했다. 강희제는 1676년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을 답사하게 한 후 산신께 제사를 지내게 했다. 1683년에 또 관리를 파견했으나 압록강 상류에서 조선 민간인들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조선에 엄청난 파장과 다수의 희생을 일으켰다.

둘째, 만주 지역의 장악과 개척 필요성 때문이었다. 남쪽에서는 포르투갈 등 서양세력과 무역하고, 17세기 중반에는 명나라 복국군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1683년에는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1666년에 헤이룽강 상류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한 후 송화강 유역까지 남진하자 전투를 벌였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했다. 서쪽으로는 강력하게 성장하는 중가르 제국과 충돌하고, 1687년에 신장성 지역을 원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희제는 전통적인 명분과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국제관계를 인식하는 중이었고, 영토 또한 서양의 국경개념을 수용해 조약을 맺었다.

강희제는 만주의 안정과 개척, 백두산의 성지화를 위해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남만주와 국경 지역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개척하는 이민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에 놀라 ‘영고탑 회귀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불안한 상황이었다.

셋째, 지리개념의 변화와 서양문물의 수용이었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술이 도입되면서 정확한 지도의 작성이 가능해졌다. 강희제는 1708년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 신부에게 전국의 영토와 국경을 조사하고, 지도를 제작할 것을 명했다. 레지 일행은 1709년부터 최신의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만주 일대를 측량했고, 같은해 12월 만주지역의 지도가 완성됐다. 강희제는 1710년에 조선에 파견된 사신단에 측지학자를 보내 조선지도를 구해왔고, 레지는 이 지도를 참고 및 보완해서 1718년에 최종지도를 완성했다(김득황, 『백두산과 북방경계』). 이 무렵 조선은 이 지역을 그린 지도를 가졌고, 급변하는 상황의 중요성도 인식했다. 다만 패전국이었고, 환국 등과 을병 대기근을 겪고 난 후유증으로 청나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강희제는 두 강 이북에서 조선인들과 여진인 한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확정시키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1712년 3월에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길림) 총관인 목극동은 조선 관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로 백두산의 대택(천지)에 올라갔다. 내려온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한 후에 천지(대택)의 동남쪽 4km 지점(해발 2150m)을 지정한 후에 높이 70.6cm, 폭 54.6cm의 돌비를 세우고, 82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는 1929년(1931년 7월 설)에 사라지고, 현재는 주변에 표지석인 돌무더기만 일부 남아있다(이한기, 『한국의 영토』). 그런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들이 나왔다. 19세기 후반부터 간도 분쟁을 거쳐 최근에는 간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된 상태이다.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투먼(圖們)은 위치, 지형, 물길, 발음 등이 분명히 다르다. 목극등(穆克登)은 지형을 설명하면서 토문(강)의 물이 끊어진 곳(건천)을 조선에서 표시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두만강 선을 고수한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박권은 두만강이 그곳이 아니라며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목극등은 ‘토문’이 분명하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목극등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청나라는 레지가 정확하게 측량한 후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만든 만주지도가 이미 있었다(1709년 12월 완성).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고(奉旨) 국가사업을 실행하는 목극등이 이 지도를 참조했거나 소지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1차 답사에서 토문강이 송화강과 합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천지(대택)를 포함한 백두산(장백산)을 청나라의 영토 또는 관할권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은 이때 백두산과 대택(천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청나라에 넘기고 말았다. 다음해(1713년) 9월에 중단될 때까지 토문강 상류의 건천(끊어진) 부분에 185개의 흙무더기와 돌무더기를 쌓고 목책을 설치했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또 하나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만약에 ‘토문’이 ‘두만’이라면 두만강 이북은 청나라 영토이어야 한다. 그런데 레지가 측량하고 조선의 지도를 참고해 만든 프랑스인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1718년에 완성된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에는 조청의 경계선이 더 북쪽에 그려져 있다. 당빌의 지도를 보면 두만강 하구 약 6km 동쪽 지점에서 시작해 백두산을 가로질러 압록강 상류의 모든 수계를 포함하는 동서산맥에 선을 긋고, 봉황성의 남쪽을 압록강 하구의 대동만에 이르는 지역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는 듀 알드의 '중국지'에서도 동일하다. 당빌은 '새중국지도'의 서문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거의 정확하고 완전함을 강조했다(김득황, 『백두산과 북방경계』).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 레지가 측량했을 때, 목극등이 비를 세웠을 때, 강희제가 승인해서 서양까지 알려진 '황여전람도'가 반포됐을 때에는 조선의 영토를 두 강의 이북까지 인식했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지도를 제공한 조선도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고, 이를 입증하는 지도와 글들이 많다. 반면 토문을 두만강으로 인식한 다른 견해들이 있으므로 논쟁은 계속 중이다. 하지만 '연행록'을 비롯해 다른 자료들의 비중을 고려하고, 실제 사건들과 향후 전개된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하면 두 강은 국경선이 아니라 청나라의 무력과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설정된 봉금지대의 남쪽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무인지대로 지금의 ‘휴전선(DMZ)’과 동일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더불어 정계비에 새겨진 ‘압록’과 ‘토문’은 본류만이 아니 수계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당빌이 만든 '새중국지도' 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 정계비 문제는 압록강 이북의 조선영토 및 국경선과 더불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정계비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고, 심지어는 비의 위치가 4번이나 이동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러시아의 영토 전문학자인 갈레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를 통한 공격’을 했다.” 중국인들은 지도를 왜곡하거나 유리하게 만들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지도를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을 쓴다는 것이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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