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입력 2021-02-17 17:23   수정 2021-02-18 00:10

1960년 11월, 잡지 《새벽》에는 ‘광장’이라는 소설이 실렸다. 스물다섯 살 최인훈은 ‘작가의 말’에서,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적었다. 성급한 기쁨이었다. 이후 사반세기 군부독재 때문만이 아니라 61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한국 정치가 정치가 아니라 정신병이고 보면, 그 원인을 밝혀 직시하는 것은 가장 프로이트적인 치료행위다.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이씨 왕조가 아닌, 새 나라를 원했다. 이념계파들이 난무하던 독립운동사에서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중반 조선 인구 30% 이상이 노비였고 사대문 안에서는 절반이 넘었다. 우리 중 셋의 하나는 노비의 후손이 ‘아닐 리가 없다’. 미셸 오바마는 자신의 조부가 노예였으며 백악관은 흑인노예들이 지은 집이라고 말했다는데, 이 땅에서 노예제가 사라진 것이 고작 120여 년 전이다.

조선 노예제는 미국 흑인노예제보다 더 극악했다. 수많은 노비를 포함해 막대한 재산을 가졌던 ‘청빈선비’ 퇴계와 율곡은 충격적이지 않다. 실학자로 추앙받는 다산 정약용은 신분제가 훼손돼 나라가 망할 거라며 1801년 공노비 해방조치에 강하게 반대했다. 《목민심서》의 다산은 정통 주자성리학 양반이었던 것이다. 신랄한 풍자의 자유인 연암 박지원도 노비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마르크스적으로 말하자면, 그게 딱 그들의 계급적 세계관적 한계였다. 우리가 다산에게 실학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게 대체 뭐냐?”고 되물어올 것이다. 실학은 1930년대에 최남선, 문일평 같은 이들이 조선에도 ‘근대의 씨앗’이 있었음을 억지 쓰려 고안한 것이다. 그러나 기실 ‘일제식민지근대화콤플렉스’도, ‘실학자’ 정약용도 필요치 않은 것은, 우리의 근대화가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25전쟁 리셋을 거친 뒤 1960년대에야 제대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한 언론이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1961년 조선일보 9월 11일자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렇듯 역사는 ‘시대의 괄호’를 잘 설정해야 보인다. 나는 운동권세대를 민주화세대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군부독재 괄호 안에 넣어 그 시대의 일부로서 처리해야 한다.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하는 자들이 자신들이 가장 금기시해야 할 ‘민족’이라는 허상을 쇠사슬 삼고 정치진영과 대중파시즘을 노예제 삼아 주자성리학 양반 노릇을 하며 사화(士禍)와 중국사대에 미친 것을 보면 여기는 딱 ‘조선’이다. 화폐개혁이 필요한 것은 동전과 지폐를 예외 없이 메우고 있는 조선인들 때문이다. 정치적 분열로 합의가 어렵다면, 정치인들은 아예 배제하고 가령 인류 최고의 탐험가 고 박영석 대장 같은 ‘대한민국인’이 만 원권 지폐에 들어가길 바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집단최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근대’의 벽에 부딪혀 피 흘리고 ‘샤머니즘적 파시즘’에 칼춤을 추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가 괴로워서다. 한국과 조선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우리는 한국인이지 조선인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중인과 노비들이 세운 민주공화국이다. 귀족들을 거부한 평민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미국처럼.

그런데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선인으로 살아간다. “새 공화국”에서도 “그 자유를” 살지 못하고 스스로 “아시아적 전제”에 노예가 돼가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모두가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오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분란을 이해 못 하는 것이다. ‘조선으로부터의 독립.’ 이 슬로건이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자신을 둘러싼 나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끝에 사막에 홀로 서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최인훈은 3년 전 별세했고, 우리는 이 시대에 대해 물어볼 작가가 없다. 나 자신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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