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 갖고 오랑캐의 나라 찾은 사람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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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28 08:00   수정 2021-03-01 15:03

사명감 갖고 오랑캐의 나라 찾은 사람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어느 시대에나 실패와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식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1765년 35살의 홍대용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후 신기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귀환했다. 이어 15년 후인 1780년 초여름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이 늦은 나이인 43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시 외곽인 구련성에 닿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어 봉금지대를 통과해 청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봉황성에 이르자 고구려를 회고한다. 이미 역사를 공부하고 온 그는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고, 『자치통감』까지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을 전개한다. 평양과 패수의 위치, 지명의 이동, 낙랑문제 등 예민한 문제들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북경을 거쳐 황제의 여름궁정인 열하까지 방문하고 다섯달 만에 귀국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해 3년에 걸쳐 무려 26권에 달하는 기행문인 『연암일기』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 보완한 그 책은 필사본 때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

궁금하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

닫힌 나라에 살던 조선사람에게 외국이면서 침략국이고 대국인 청나라의 문물과 실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로 쓰인 ‘호질전’, ‘허생전’ 등은 현실을 뼈아프게 풍자했으니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상호비교했고, 조선에 필수적인 서양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현실을 파악하는 학습서와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한 지침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형식을 벗어난 문체와 체제 비판적인 내용, 숨겨놓은 메시지로 인해 기존의 세력가 및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샀다. ‘문체반정(새 문장을 배격하고, 소설 등의 수입을 금지한 정책)’을 주장한 정조로부터 질책까지 받았던 ‘금서’에 가까운 책이었다.

박지원은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책을 집필했을까? 또 적지 않은 가난한 학자들이 자비를 들여가며 연행사를 따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상황과 사명감 때문이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황폐해진 토지, 포로, 질병, 대량 아사로 '절망의 땅'이 돼버렸다. 곳곳에 만연한 패배감, 상처받은 자존심, 극에 달한 관리들의 탐학, 민란 발생 등으로 조선 체제는 총체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박지원의 스승인 이익도 정확하게 갈파했지만 한정된 관직과 토지 때문에 공정한 분배가 어려웠다. 탐욕과 체제의 특성상 관직과 토지의 집중현상도 심화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세력은 유례없는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성리학’이라는 절대 논리를 명분으로 내세운 채 사상투쟁의 형태로 빠져들었다. 피를 부르는 진영 싸움 속에서 사도세자가 죽었고, 임금의 죽음마저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외부와 직접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간접적인 교류를 막았다. 정보를 독점하고 자유의지를 억압했다.
이에 지식인의 반성과 주도사상의 변화, 사회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대상황이 도래했다.

그렇다면 어떤 세력이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추진하고 주도했을까? 18세기에 들어 일단의 이상주의자와 젊은 학자들은 이론을 만들고 현실개혁 의지를 표출했다. 뒤를 이어 신분의 차별 때문에 소외당하는 서얼들이 선봉에 섰다. 이들은 민란이나 변란을 일으킬 수 없는 지식인이라는 한계 속에서 일종의 사상투쟁과 개량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성리학을 변화시키거나 대체할 이론과 사상, 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전통사상은 이미 개국 초기부터 조직적으로 파괴돼 기반이 붕괴했고, 전통신앙은 미신으로 몰리다 스스로 오염된 지 오래된 상황이었다. 불교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고, 절이 산속에 있어 ‘세’를 규합할 수 없었다. 정제두 등 일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리학의 변형으로 ‘지행합일론’을 내세우는 양명학을 정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만 병자호란 때 포로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과 일부 포로들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신문물과 서양지식, 천주교 등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유형원, 이익 등의 자생적인 개혁파들이 나왔다.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고 외부세계를 체험한 학자들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그 시대에 외국에 나갈 승인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파견한 관리와 상인, 수행원이었다. 첫째는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이었다. 3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은 12차에 걸쳐 파견됐는데,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18세기의 일본은 자체의 발전정책과 난학(네덜란드학)의 수입을 통해 새로운 지식, 기술 등을 보급받아 국력이 팽창했다. 김세렴·신유한·조엄 등 몇몇 인물이 일본 사회를 분야별로 분석하고 기록하며, 난학의 우수성도 언급했다. 이들은 고구마를 들여오고, 수차 기술 등도 전달했지만 조선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개혁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 자체가 학습과 수용의 기회가 아니라 시혜와 과시, 일본의 군사적인 도발을 막으려는 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자세는 자랑과 오만, 일본에 대한 멸시가 많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반면 청나라에 공식 파견된 연행사는 달랐다. ‘북학파’라는 세력으로 조선후기의 사회개혁과 실학의 초기 주체로 변신했다. 이들은 일단 규모가 컸다. 1회에 30인의 정식인원과 수행원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파견됐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250여 년간 507회였으니 총 인원을 고려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박작성·구련성 등을 보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눈길과 가슴을 떠올린다. 불안한 조선의 현실을 떨치지 못한 채로 사명의식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금지대를 통과해 경계선인 봉황성(鳳凰城)에 닿았다. 이어 요양·심양을 경유하며 요하를 건너 홍대용처럼 의무려산을 넘어 요서지방에 들어서 고조선의 유적들을 보며 베이징까지 총 3,100리를 갔다. 왕복 5개월여 동안 그들이 본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지식과 기술, 문화는 어땠을까.

건륭제가 재위하던 18세기 중반 청나라는 160만 평방km라는 가장 넓었던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발달된 상업과 무역으로 부유했다. 서양의 발달된 기술과 과학지식, 천주교를 수용해 문화도 발전했다. 연행사들은 베이징에서 공식적으로 60일 동안 체류가 가능해 공적 업무 외에도 사적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사적인 시간에는 33일 동안이나 중국의 각지에서 온 학자들과 교류했다. 지금도 한국인들이 방문하는 고서점가인 유리창을 비롯해 천주교와 성당 등을 답사했다(김인규, 『홍대용』). 전쟁에 굴복했으면서도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비웃었던 오랑캐들이 성취한 놀라운 현실을 목도하고 체험한 연행사들에게 조선이 간직한 모화사상은 뿌리까지 뒤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후반부 구간을 빼놓고는 찾은 지역이 고구려 영토였던 만큼 고구려 역사를 인식했고, 사실들을 규명했다. 지금도 봉황성(고구려 오골성)을 비롯한 압록강 하구와 요동지방에는 많은 고구려의 성과 무덤들, 마을 유적이 있다. 요서 지역에도 원(고)조선과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들이 많다(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이러한 조상들의 역사는 그들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까? 연암의 제자인 안정복 등의 역사 서술에 어떻게 작동했을까?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안시성 공방전을 벌일 때 양만춘이 쏜 화살에 당태종이 눈을 맞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안시성의 성주였던 ‘양만춘’의 이름을 찾아주었다(박지원, 『연암일기』, 한국고전 번역원).

연행사를 따라간 이들은 저술, 전파, 실천 등을 주도하면서 현실적인 세계관과 백성들의 생활향상 등을 목표로 삼은 ‘이용후생’을 정책 목표로 표방했다. 이를 위해 청나라와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경제, 정책,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또 자의식의 부활과 역사해석의 자주적인 관점 및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다. 이들은 지역적 의미와 실용성이라는 논리적 배경까지 갖춘 ‘북학’을 자처하면서 ‘실학’의 핵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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