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싸운 그녀들, 역사가 되다

입력 2021-02-28 17:07   수정 2021-03-01 00:11

소복을 입은 여성이 강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다른 손가락보다 한 마디 짧은 왼손 약지에는 흰 붕대가 칭칭 감겨 있다. 무장 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에서 무력투쟁에 앞장섰고,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혈서를 쓰고 단지(斷指)를 한 남자현 열사(1872~1933)다. 그가 임종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결연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윤석남 화백(82·사진)의 붓을 통해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윤석남의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전에서다. 이번 전시는 남자현 열사를 비롯해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와 대형 설치작업 ‘붉은 방’을 선보인다.

유관순 열사를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윤석남의 채색으로 살아난 그들의 결연한 기운과 의지는 후세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어도 우리 역시 이 땅을 지켰노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지금의 조국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울림을 전한다.

윤 화백은 아시아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꼽힌다. 아크릴로 서양화를 그렸던 그는 2011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충격받아 전통 방식 채색화로 전환했다. 한지 위에 가는 붓을 이용해 안료를 입힌다. 2018년 채색화로 그린 자화상을 처음 선보인 뒤 2019년 여성 지인 22명의 초상화 연작을 발표했다.

다음 작업을 고민하던 중 일제강점기 당시 초상화집을 보게 됐다.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여성의 초상은 맨 뒤에 있는 두 점이 전부였다. 울화가 치밀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록하기로 마음먹고 자료 수집에 나섰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찾고 그들의 활동을 추적했다.

“여성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에 어떻게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는지 신기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자부심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국의 독립운동이지만 여성 해방운동의 통로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초상화 작업은 사진으로 얼굴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작은 크기의 초상화로 얼굴을 최대한 정확하게 복원한 뒤 대형 작업에 착수했다. 얼굴 묘사는 정확하게 하되 표정과 몸짓은 각 인물의 생애를 바탕으로 상상하고 구현했다. 남편인 단재 신채호의 유골함을 들고 있는 박자혜의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 원산신학교에서 교육 계몽사업에 헌신한 김마리아의 진취적인 포즈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윤 화백의 초상에서는 손이 유독 크게 표현된다. 매끈한 섬섬옥수가 아니라 세월과 고난을 담은 거칠고 투박한 손이다. “손은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보여주죠.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저에게 손이란 그 사람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고령인데도 윤 화백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하다. 아직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인물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란다. 그는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 3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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