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봄 새 학기의 추억

입력 2021-03-02 17:23   수정 2021-03-03 00:06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바깥 날씨도 어떤 날은 아직 한겨울 날씨처럼 매섭고 또 어떤 날은 봄처럼 따뜻하다. 이러다가도 갑자기 눈이 오는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내 고향 대관령 아랫마을은 마당에 매화꽃이 핀 다음 어김없이 눈이 내리곤 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개학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이 펑펑 내려 며칠 학교에 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학교 입학식까지 마친 다음 다시 겨울로 돌아가 짧게 눈방학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화 같은 시절의 이야기다.

대관령 아래 산골마을에서 자란 나에게 새 학기는 어른들의 한 해 농사 준비와 때를 같이 한다. 어른들의 일부터 이야기하면 겨우내 외양간에서 나온 거름을 논밭으로 실어내는 일부터 한다. 소가 춥지 말라고 매일 저녁 외양간 바닥에 이부자리처럼 깔아주던 짚과 쇠똥거름이다. 봄이 되면 그게 쌓이고 쌓여 산과 같은 두엄더미를 이룬다. 어른들은 그걸 논밭으로 져내는 것으로 한 해 농사일을 시작한다. 지금이야 모두 경운기나 트럭으로 짐을 실어내지만, 그때는 순전히 지게로 그 일을 했다. 한 해 농사의 첫 준비가 바로 논밭으로 거름을 내는 일인데, 어른들은 거름을 내며 그해 논밭마다 무얼 심을지 계획한다.

바로 같은 시기에 우리들은 새 학기를 맞이한다. 초등학생이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쓰는 중학생이 되는 것도 이때고,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는 것도,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는 때도 이때다. 어른들의 한 해 농사가 논밭에서 이뤄진다면 우리의 한 해 농사는 학교와 책상에서 이뤄진다. 평소엔 어제가 오늘 같은 평범한 날들을 보내다가도 막상 개학이 되고 새 학기가 되면 왠지 꼭 새로운 출발점에 선 것처럼 우리의 마음 자세도 달라지곤 했다.

3월이 되면 예전 그 시절의 일들이 저절로 생각난다. 내가 막 중학생이 됐을 때 큰형은 군대에 갔고, 작은형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다. 나와 동생은 저마다 새 학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그해 어머니가 수시로 장독대에 떠놓던 정화수다.

동네 우물물이 가장 맑은 때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이다. 그래서 마을 어머니들이 남보다 일찍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 나가 그 물을 떠 와 커다란 놋양푼에 담아 정화수로 장독대 위에 올려놓았다. 멀리 군에 간 아들의 안녕도 기원하고, 3월 새 학기를 맞이한 아들딸의 학업도 응원하고 축원한다. 한낮엔 해가 정화수 위로 지나가고, 저녁이면 달이 근심스러운 어머니의 얼굴처럼 정화수 위에 비친다.

나는 지금도 1년 열두 달 중 3월이야말로 바로 그런 정화수와 같은 달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해의 농사와 한 해의 공부를 정화수를 긷듯 정성스럽게 생각하는 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 매일 매일이 새롭지만, 그중에서도 3월은 더욱 새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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