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몰빵 전원믹스'는 위험하다

입력 2021-03-07 18:29   수정 2021-03-08 00:04

벽에 걸린 액자를 부숴 난로 땔감으로 쑤셔 넣고, 꽁꽁 언 손을 촛불에 쪼인다. 골목길에 앉아 너무 추운 나머지 손이라도 녹이려고 성냥불을 켰던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최고 국가인 미국 텍사스에서 최근 일어난 일이다.

30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로 가스관이 동파되고, 풍력 터빈도 얼어붙어 무용지물이 되자 텍사스 전체가 일순간에 멈춰 섰다. 휴스턴 시내 현대식 고층 건물도, 최첨단 반도체 공장도,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저택도 전기 공급이 끊기자 모두 한낱 콘크리트 구조물일 뿐, 엄혹한 한파를 막아주지 못했다. 현대 문명은 에너지 공급이 끊기자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번 한파가 미국 전역을 뒤덮었으나 유독 텍사스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로부터 원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텍사스의 발전설비 구성을 작년 말 기준으로 살펴보면 가스발전이 52%, 풍력이 약 23%로 두 개 전원이 거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런 한파로 가스관이 동파되고 풍력터빈이 얼어붙자 일순간에 원시 상태로 돌아간 듯한 혼란이 초래된 것이다. 그나마 원전은 4개 중 3개가 가동돼 최소한의 전기가 공급될 수 있었기에, 대규모 사상자 발생은 막을 수 있었다.

여기서 이번 사건의 중요한 원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전원 구성의 실패다. 가스와 풍력 발전에 지나치게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텍사스는 셰일가스 생산의 본거지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풍력 잠재량을 보유하고 있어 가스와 풍력 비중이 높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지만, 에너지 안보와 수급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해 보면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만일 몇 년 전에 취소한 신규 원전을 계획대로 추진했다면 이번 피해 규모는 사뭇 줄었을지 모른다.

미국은 52개 주가 보완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해 가는 국가다. 전기 수급도 인접 주와의 긴밀한 거래를 통해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전기가 일시적으로 부족해지면 인접 주에서 끌어다 쓸 수 있도록 전력망이 연결돼 있다. 텍사스만은 예외적으로 독립된 전력계통망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주와 전력계통이 연결돼 있지 않아 위급 상황이 생겼을 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여기서 이번 사건의 또 한 가지 원인으로 고립된 전력망을 들 수 있다.

이번 텍사스 대정전 사건은 남의 나라 불행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더 걱정된다. 미래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불행의 데자뷔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작년 말 확정된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2034년 전원 구성을 살펴보면 액화천연가스(LNG)가 30.6%, 신재생에너지가 40.3%로 두 전원이 70%를 넘을 전망이다. 이는 탈(脫)원전, 탈석탄 정책 기조가 반영된 결과인데, 현재 텍사스의 전원 구성과 흡사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또 우리나라 전력계통도 텍사스처럼 완전히 고립된 ‘전력섬’이라는 사실에 더욱 찝찝해진다.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탈원전, 탈석탄 정책을 밀어붙이면 이번 텍사스 대정전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섞고 연결해야 한다. ‘몰빵 에너지믹스’는 위험하다. 기승전 재생에너지도, 원자력 르네상스도, 탈원전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급 실패 위험은 다양한 옵션을 많이 섞을수록 낮아진다. 원전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정의로운 척하기 위해 원전을 악마로 덧씌웠다면 더욱 안 된다. 원전은 정의도 불의도 아닌 현대 과학의 산물일 뿐이다. 원전도 무탄소 에너지로서 에너지믹스의 다양성에 기여하게 해야 한다. 중국, 일본 등과의 전력계통 연결을 통해 전력 수급 안정을 위한 옵션을 추가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고립된 채 재생에너지와 LNG에 몰빵하는 믹스를 고집해 이번 텍사스 대정전을 예고편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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