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라면'으로 세계 울리고 떠났다…신춘호 농심 창업주 별세

입력 2021-03-27 08:53   수정 2021-03-27 10:15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이 2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신 회장은 1930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1965년 농심을 설립해 56년간 기업을 이끌었다. 신 회장은 평생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라면과 과자를 만들었다. 대표작인 신라면은 전세계 100여개국에 수출돼 식품의 외교관으로 불린다. 500만원으로 2조원의 회사를 일구며 식품업계 '1세대 벤처인'으로 존경 받았다.

"농사 짓는 마음으로 일하면 못 이룰 게 없다"
신 회장은 '이농심행 무불성사'를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일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뜻이다. 그는 우직하고 성실하게 흘리는 땀의 숭고함을 믿었다. 농부가 자연의 섭리 속에서 땅을 일구듯 새로운 도전과 사명으로 오늘의 농심을 이뤘다.

신 회장은 실패에 너그러운 경영자였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50년 넘는 장수 기업에 30년 넘는 메가히트 상품들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비결로 꼽히는 배경이다. 1985년 국내 라면시장 1위에 오른 농심은 신라면을 내세워 세계 무대에서 ‘K푸드’의 대명사가 됐다.

신 회장은 92세의 고령 경영인이었지만 최근까지도 회사 현안을 직접 챙겨왔다. 지난해 농심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국내외 주력 사업이 모두 안정적인 상승 궤도에 오르면서 지난 2월 퇴임했다. 최근 노환으로 가족들과 투석을 받으며 치료해왔으나 마지막까지 회사의 미래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실패하라"…'뚝심 경영'이 이룬 라면왕국
신 회장은 반세기 경영 원칙은 '우보만리'로 요약된다. 1965년 롯데라면을 처음 개발한 이후 지금까지 '식품업의 본질은 맛과 품질'이라는 원칙을 지켜왔다. 화려한 광고와 마케팅보다 제품 본질의 품질 경쟁력을 갖춰야 100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지금의 농심을 만든 장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고기라면,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짜파게티, 신라면, 안성탕면 등 라면 제품과 새우깡, 감자깡, 양파링, 꿀꽈배기 등 스낵 제품이 당시 20년 간 출시된 스테디셀러들이다.

신 회장은 사내에서 '작명왕'이라고 불릴 만큼 농심의 모든 제품명을 직접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12.6% 증가한 2조6398억원, 영업이익은 103.4% 증가한 1603억원이었다. 해외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50년 제면기술 연구 식품업의 '본질'을 남기다
고(故)신격호 명예회장의 동생인 신 회장은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하다 형의 만류를 무릅쓰고 롯데공업을 차린 인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학업과 장사를 병행했다. 부산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쌀을 싸게 팔려다 실패도 했다. 그런 경험이 평생 품질 경영을 하게 된 배경이 됐다.

농심을 1등 기업으로 키운 건 투자와 기술 개발이다. 1965년 첫 라면을 생산한 해에 라면연구소를 세웠다. 서울 대방공장을 모태로 안양공장, 부산 사상공장, 구미공장 등을 첨단 식품 생산기지로 만들었고 해외 중점 국가인 미국, 중국에도 대규모 공장을 지으며 진출했다.

기술이 곧 품질이고 혁신이라고 믿어온 신 회장은 2010년부터 직원들에게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또 "라면 업계 지난 50년이 스프 경쟁이었다면 앞으로 50년은 제면 기술이 좌우할 것"이라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쟁사와의 연구개발(R&D)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강조했다. 굵은 면발 열풍을 일으킨 짜왕과 맛짬뽕(2015), 신라면의 제 2전성기를 이끈 신라면건면(2019) 등 혁신 제품들은 이 같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이 원가를 낮추기 위해 굵은 면에 일부 들어가는 쌀가루를 5년 묵은 통일미를 사용하다가 신 회장으로부터 "품질은 좋은 원재료에서 나온다. 프로젝트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불호령을 듣기도 했다.

라면 외 사업군에서도 식품업의 본질에 투자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 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국내 최초의 짜장라면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만들어진 결과다.
글로벌 기업의 '근육' 만들고 떠나다
신 회장의 눈은 늘 글로벌을 향해 있었다. 농심은 눈앞의 변화만 좇기보다 멀리 보고 기술과 인프라를 준비하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산시설도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미리 준비했다. 해외 진출도 마찬가지다.

신 회장은 1980년대부터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고 말하며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때문에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먼저, 가장 공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1971년. 창업 6년 만이었다. 농심의 눈은 이후 늘 세계 무대를 향했다. 남극의 길목부터 알프스 최고봉에서까지 ‘신라면’을 팔고 있다.

1981년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다. 중국 공장을 3개까지 늘린 뒤 200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공장을 지었다. 현재 90% 이상 가동되고 있는 미국 제1공장으로는 물량이 부족해 올해 완공을 목표로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제2공장을 짓고 있다. 호주, 베트남에도 법인을 설립하는 등 농심은 세계 100여 개국에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하늘 위와 땅끝까지 농심은 ‘실핏줄 전략’으로 신라면을 팔았다. 스위스 최고봉 몽블랑의 등산로와 융프라우 정상 전망대, 남아메리카 칠레 최남단 마젤란해협 근처의 푼타아레나스, 스위스 마터호른과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매점,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식량농업기구 본부 면세점까지 진출했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느리지만 견고하게 ‘초격차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를 넘었고, 2015년엔 5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농심은 전체 매출의 약 40%인 1조1000억원을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달성했다. 농심의 올해 해외 매출 목표는 전년보다 15% 이상 높여 잡았다. 올해 해외 매출은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할 전망이다.
농민과 함께 성장해온 반평생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뿌리에는 국내 농가와의 상생도 자리잡고 있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에서 완전 분리해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며 제 2의 창업을 하며서 "먹거리의 기본인 농산물을 만든다는 마음이 담았다"고 했다. 농심이 지금도 과자와 라면 제품 등에 국내산 아카시아 꿀, 완도산 다시마, 국내산 감자 등을 적극 고집한다.

농심은 너구리 생산을 위해 국내산 다시마를 연간 400t 이상 구매해왔다. 1982년 너구리 출시 때부터 최고 품질의 다시마를 쓰는 제조방식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지금까지 농심이 구매한 다시마의 총량은 1만7000t이 넘는다. 농심이 한 해 구매하는 다시마는 국내 식품업계 최대 규모로 완도지역 연간 건다시마 생산량의 15% 수준이다.

스낵 시장의 장수 제품인 꿀꽈배기에도 그 동안 국내산 천연 아카시아꿀을 8000t 이상 사용됐다. 국내 연간 아카시아꿀 생산량의 25%를 농심이 사용한다. "설탕보다 비싸지만 맛과 영양이 월등한 국내산 꿀을 사용하라"는 신 회장의 원칙 때문이었다.

국내산 감자를 사용해 감자칩을 만들어온 농심은 최근 청년농부의 판로를 확대해주는 상생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파종 전 사전 계약으로 선급금을 지급하고 영농관리 교육과 품질 관리 등을 함께 한다는 목표다.

농심 관계자는 "국내산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식품산업의 근간을 지켜야 한다는 게 신 회장님의 철학이었다"며 "영면하시기 전까지 이 같은 점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며 발인은 30일이다. 장지는 경남 밀양 선영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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