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혼란의 조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1-03-28 05:30  


개항 후 한국의 지성계와 정계는 친일·신진·개화·진보 세력과 친청·기득·쇄국·보수세력으로 분리돼 갈등 또는 협력을 벌였다.

1910년에 멸망할 때까지 병인양요부터는 44년, 강화도 조약부터는 35년의 기간 이른바 강산이 3번 이상 변했다. 이 격렬한 역사의 전환기는 참여한 인물과 주요사건을 근거로 구분하면 총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5년부터 1882년까지로 운양호 사건부터 임오군란까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인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에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에 통신사가 끊어진 후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은 문제점이 많았다. 제 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인천은 청나라를 의식한 곳으로 한양으로 침투하는데 최단 거리다. 원산은 동해 진출에 적합한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적합한 장소다. 이 조약이 경제적 이익, 조선 지배뿐만 아니라 국제관계, 해양의 중요성 등을 고려한 장기정책이었음은 청일전쟁·러일전쟁·독도 문제 등에서 확인됐다. 또한 제 7조는 일본이 조선 연안을 측심하고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군사작전의 교통로는 물론 상륙지점을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윤명철, 『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이 조약으로 패배감은 물론이고, 개항과 서구문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확대재생산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제 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500년 가까이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중화적 질서를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조선이 크게 반성하고 강력한 의지와 능력을 배양했다면 근대 문명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들이 부과한 유사한 개항압력에 효율적으로 적응해 성공했다. 그들은 어떻게 성공했고, 우리는 왜 실패했을까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조약을 체결한 신정권은 대원군과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성공시키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또한 조선의 능력과 현실을 자각하고, 불안과 충격,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은 3가지 부류로 나뉘어 대응했다.

첫째, 외세를 배격하는, 즉 ‘척양 척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림들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이며 기득권 세력들이었다.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이들은 명성황후 세력에 저항했고, 조약을 극렬하게 비판했다. 최익현은 '지부복궐상소(도끼를 옆에 차고 대궐 앞에 엎드려 올리는 상소)'를 벌일 정도였다. 이들은 상황 변화에 따라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하다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현대사에서 저항적인 애국자,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둘째, 자생적인 개화주의자들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진 세력들이다. 훗날 갑신정변을 비롯해 개화를 주도한 서광범·박영효·김옥균·김홍집 등 젊은 청년은 북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지도자였던 오경석·유대치 등은 역관 출신이었고, 정신적인 지주인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임오군란 이후 정책 차이로 인해 사대당(수구당)인 온건 개혁파와 독립당(개화당)인 급진 개혁파로 분리됐고, 각각 청나라와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 현실에서 실패했고, 후세까지 친일파라고 비판을 받았다. 물론 박영효 등의 반역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적·경제적 기득권층이면서도 개혁과 정의, 애국을 추구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셋째, 평민 출신의 농민들 대다수인 백성들이다. 신분적인 제약과 경제적인 빈곤으로 교육과 견문의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유교 정치의 영향으로 충·효·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국가의식 등은 미약했고, 개혁과 개방에도 미온적이었다. 따라서 비판의식과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사회개혁에 동참하는 ‘민중’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동향 속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들은 어떤 개혁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했을까?
집권 세력들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 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변하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은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 36년 후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

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 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 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후에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서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

한편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수립을 추진하고, 김홍집이 가져와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삼은 『조선책략』을 보급했다. 이 책은 청나라의 외교관인 황준헌이 일본에서 만난 김홍집과 조선의 현실과 미래를 논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외교정책을 조언한 책이다. 40년 먼저 국가적인 패배를 경험한 청나라 관리인 그는 러시아의 남진을 극도로 우려하는 조선 청 일본 미국을 활용하라는 ‘친(親)청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이라는 정책구도를 제안했다. 즉 삼국은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고, 미국의 역할을 활용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서양 풍속들과 천주교의 범람을 막는 일에 의미를 둔 유림들과 보수세력들은 ‘위정척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운동과 사상투쟁을 벌였다. 영남의 유생은 1만 여명의 서명을 받아 궁궐 앞에서 집단 상소했다. 이른바 ‘만인소’이다. 그리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정부에 대항해 백성들과 더불어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의 처단까지 요구했다. 결국 1882년 5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한 이 조약으로 관세제도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에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고, 근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개혁 정부는 별기군을 운영하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의 예산을 빼서 투입했다. 그러자 1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한 데다가 처우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군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했다. 초기에는 목적의식이 희박하고, 사적 이익과 연관된 군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소요였다. 하지만 대원군 등의 책략과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로 변질해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고, 교관을 비롯한 일본 경찰들을 살해했다.

대원군은 백성에게 반일 감정을 불어넣으면서 명성황후와 개혁세력의 살해를 기도하고, 개혁을 좌초시켰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탈출에 성공했고,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하자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이끌고 와 대원군을 체포한 후에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당했으며, 조약의 전문에는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청은 외교적인 사항들은 자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주둔한 3000명의 군대로 조정을 협박했다. 피해국인 일본도 이를 이용해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한국의 대외관계사와 외교사』수록 논문).

임오군란의 배경과 평가를 놓고 명성황후 세력의 부패라는 책임 전가론이 있으나 세도정치나 대원군 시대에도 부패상황은 심각했으며, 군도 부패하고 무책임한 집단이었다. 결국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조선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을 좌절시켰다. 또한 청일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개혁세력을 사대당과 독립당으로 분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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